본문 바로가기

33

눈 온 날 눈이 왔다. 하얀 눈이 밤새도록 소복소복 내려서 걷는 발 밑에서 사박사박 소리를 냈다. 하얗게 눈이 쌓인 길을 걷다가 바라본 벚나무 터널이 눈꽃 터널이 되었다. 봄이면 하얗게 벚꽃이 피었다가 하르르하르르 떨어져 내리던 길, 여름이면 푸르게푸르게 녹음으로 보는 이의 눈을 싱그럽게 하던 길, 가을이면 벚나무의 단풍도 참 곱고 이쁘다는 생각을 새삼 갖게 만들던 길, 어느 하루 벚꽃이 눈처럼 나리고, 또 어느 가을 하루 비처럼 나뭇잎이 나리던 길에 어제는 바람이 한번씩 불 때마다 눈가루가 떡가루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 하고 탄성이 올라왔다. 눈이 와서 따뜻한 것이 그리워지는 날. 떡만둣국을 끓여 먹었다. 뜨거운 것을 하하, 거리며 배불리 먹고 난 두 녀석들은 무장을 하고 눈싸움을 하러 나갔다. 몇 시간 지난 .. 2006. 12. 18.
겨울 나무를 보며 자동차로 길을 달릴 때면 이따금 남편에게 말했다. "담양에 가면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길 이래." 11월이 깊을 대로 깊은 어느 저녁, 퇴근해서 들어서는 남편이 부엌에 있는 나를 숨 가쁘게 불렀다. "이리 와 봐. 얼른 와 봐. 내 좋은 것 보여줄게." 컴퓨터를 켜고서 디카 연결하더니 이 사진을 보여줬다. 전라도 쪽으로 1박 2일 출장을 다녀온 길이었다. "내 당신을 위해서 찍어왔지. 멋있지?" 감탄했다. 아니, 감탄해줬나? 영암에 있나? 월출산도 먼발치에서 찍어 왔다. 그것도 나를 위해서란다. 역시나 손뼉을 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약간 벌려 그 사이로 감탄사를 연방 내놓으며 감격해줬다. 남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에 힘을 .. 2006. 11. 28.
낙지 열 마리 방금 낙지 열 마리가 들어왔다. 5시 반쯤 아이들은 농구 경기를 보러 간다고 부천 경기장에 갔다. 그 근처에서 퇴근 후 운동을 하던 남편이 경기가 끝나면 아이들을 태워서 집에 온다고 했다. 느긋하게 밥을 안치고 두부를 부치고 방을 닦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초등학교 동창인 고향 친구이다. "응." 하고 받았더니 "야, 너네 집이 부개역에서 머냐?" 하고 묻는다. "아니. 한 정거장 차인데." 자기가 지금 부개역에 와 있으니까 부평역으로 얼른 나오란다. 시골에서 낙지가 올라왔는데 혼자 먹기는 너무 많은 양이니까 나눠 먹잔다. "야, 그냥 니네 식구끼리 먹어." 말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다는데 박절하게 가라는 것도 그렇다. "알았어. 나갈게. 남부역 방향으로 나와라." 하루 종일 .. 2006. 11. 10.
삭았다! [ 그림 : 서정 육심원 - 프린세스 ] 어제,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났다. 나는 그냥 휙 스쳐지나가는데, 상대방이 자꾸만 나를 힐끔거리는 느낌에 왜 쳐다보는거야? 하며 뒤돌아봤더니 "야, 너, 누구 아니냐?" 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어머, 언니 오랜만이다." 하면서 뒤돌아 다가갔다. 얼굴에 .. 2006. 11. 8.
내가 좋아하는 꽃 < 요건 친구가 찍어 온 것 하나 가져오고...... > 내 생일은 찬바람이 휑하니 불어서 나뭇잎을 모조리 떨구어 버린 쌀쌀한 늦가을이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두터워지기 시작하고, 따뜻한 것을 찾고 그리워하게 되는. 그맘때에 꽃집 앞을 지나가다 보면 색색의 소국이 양동이 가득 꽂혀 있는 걸 보게 .. 2006. 10. 20.
신기한 아크릴수세미 < 사진은 생각이 많은님의 블로그에서 한 장 들고 왔습니다. 아크릴수세미를 사용하고 소감을 꼭 올려달라는 생각이 많은님의 요청에 의해서 올려봅니다. ^^*> 일명 환경수세미라고도 한다는 아크릴사로 떠서 만든 이 수세미를 알게 된 것은 약 일 년 전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이라는 카페.. 2006. 10. 17.
백년해로 무심코 큰 녀석의 휴대폰 배경을 보니 우리 부부가 나란히 손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찍혀 있고 그 위에 라고 글자를 넣어 놓았다. 백년해로라는 말에 가슴이 찌릿해왔다. 녀석, 그래도 엄마 아빠의 다정한 모습이 보기에 좋았고, 늘 그리 살기를 소망했던가 보구나. 남편이 1박2일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어제 저녁. 출장 끝에는 늘 운동가는 것을 빼먹고 집으로 곧장 퇴근해 들어오길래 그리할 줄 알고서 또 출장지에서는 술을 마셨을 게 뻔해서 속도 풀릴 겸 얼큰한 부대찌개를 끓였다. 7시가 가까워 오는데도 이렇단 저렇단 전화가 없길래 큰 녀석더러 아빠에게 전화해보라고 했더니 운동 갔다가 올 거라고 했단다. 쳇, 이제는 이 마누라보다 운동이 더 좋단 말이지. 집으로 곧장 안 오고 운동을 가게...... 다른 때 운.. 2006. 10. 14.
요즘... 네이버에서 가끔씩 사진 구경을 하는데, 푸른 하늘과 붉은 황톳길과 자전거 타는 소녀의 모습이 싱그럽고 조화로워서 한 장 가져왔다. 연일 이렇게 푸르고 높은 뭉게구름, 양떼구름, 새털구름으로 번갈아 옷을 갈아입는 가을 하늘이 펼쳐지고 있다. 길을 걷다 하늘 한번 올려다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나날들... 그러나 일교차가 심한 날들이기도 해서 아이들은 어젯밤부터 훌쩍훌쩍 연신 코를 훌쩍거리다가 핑핑 풀어대고, 머리가 아프다느니 미열이 난다느니 몸의 이상 상태를 알려 온다. 상비약으로 사다 놓은 콧물. 재채기 약 먹으라고 엉터리 약사 노릇을 한다. 아이들이 시험 결과로 자꾸 협상을 걸어온다. 큰 녀석은 전교 석차를 30등 올리면 전자기타를 사달라고 하고, 작은 녀석은 이번 시험에서 세 문제만 틀리면 PSP를.. 2006. 9. 20.
여름날의 추억 그리운 내 님 꿈에서나 뵈올 뿐 님 찾아 나설 때 님도 나서면 어쩌나 다른 밤 꿈에 님 찾아 나설 때는 같은 시간 같은 길에서 만났으면 - 꿈길 -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더냐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난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 베혀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날 밤에 구비구비 펴리라 황진이, 하면 명월이, 명월이, 하면 황진이가 떠오를 것이다. 외모로 보나, 풍류의 멋으로 보나 황진이의 발끝도 건드릴 수 없는 나이지만 내게도 '명월아!'하고 부르던 분이 계셨다. 그래서 그 부름이 황송스러웠냐 하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누누이 정정해서 부를 것을 말씀드렸.. 2006. 7.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