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을 나열함

여름날의 추억

by 눈부신햇살* 2006. 7. 22.

 

< 사진 출처 모릅니다. >

 

 

 




그리운 내 님 꿈에서나 뵈올 뿐
님 찾아 나설 때 님도 나서면 어쩌나
다른 밤 꿈에 님 찾아 나설 때는
같은 시간 같은 길에서 만났으면

                                  - 꿈길 -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더냐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난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 베혀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날 밤에 구비구비 펴리라

 

 

황진이, 하면 명월이, 명월이, 하면 황진이가 떠오를 것이다. 외모로 보나, 풍류의 멋으로 보나 황진이의 발끝도 건드릴 수 없는 나이지만 내게도 '명월아!'하고 부르던 분이 계셨다. 그래서 그 부름이 황송스러웠냐 하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누누이 정정해서 부를 것을 말씀드렸지만 대답만 차지게 "응."하시고 돌아서기가 바쁘게 다시 "명월어!"하고 부르셔서 몸을 부르르 떨면서 "그리 부르지 마시라니깐요!"하고 으름장을 놓게 만들었다.

 

그분은 열다섯 살에 알게 되어 그 친구가 결혼해서 지방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약 15년여를 둘도 없는 단짝이었던, 주변 사람들이 둘이서 사귀는 줄 알았다던, 같은 옷을 입고 다니면 전혀 다른 체격과 얼굴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쌍둥이냐는 질문도 곧잘 받았던, 그리 붙어다니다 나중엔 어떡할래?라는 질문에는 이층 집을 지어서 아래위로 살면 되지,라고 대답하게 만들었던 내 단짝 친구의 아버님이셨다.

 

몇 번의 여름휴가에 친구를 따라서 친구의 고향집에 내려가 며칠씩 묵어 온 적이 있었다. 분명 이름이 누구라고 예의바르고 조신하게 얌전하게 말씀드렸음에도 어쩐 일인지 친구의 아버님은 매번 나를 부를 때면 "명월어!"하고 부르셨다. 처음엔 그 부름이 나를 부르는 것인지 몰라서 멀뚱멀뚱하게 앉아 있었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고 생각하신 친구의 아버님이 내 앞으로 오셔서 "아이, 너는 왜 불러도 대답을 안 허냐?"라고 하셔서 "어! 부르셨어요? 언제요?" 반문했더니 "아까 불렀잖냐."하시는 것이었다.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고 다시 되물었다. "아, 아까, 명월이라고 부르셨던 거요?" "응."

 

나는 어깨를 앞뒤로 흔들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친구의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아버님, 제 이름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저는 OOO라니까요. OOO!"

"잉, 알어."

그렇게 대답을 확실히 하셨다. 이제 내 이름을 제대로 알아들으셨겠거니 하고 안심을 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또다시

"명월어!"

하고 부르셨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이 다물 어지지를 않는데, 친구 어머니와 친구와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던 친구의 막내 여동생은 배를 잡고 웃었다.

"아버니이이이임!"

하고 길게 빼어서 부른 다음,

"아버님, 저 명월이 아니라니까요. 제 이름은 OOO이라구요. OOO!"

"잉, 그려. 명월이!"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배를 움켜쥐고 웃고,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 연신 아버님께 내 이름을 제대로 세뇌시키기에 바빴다. 그러나 끝끝내 아버님은 대답만 늘 차지게 하시고선 부를 적에는 일편단심으로 "명월어!"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내가 지쳐 나가떨어졌든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세요."

 

아버님은 또 얼마나 구엽기도 하시든지. 어느 하루, 쨍쨍 내리쬐는 땡볕과 푹푹 찌는 더위를 피해 선들선들한 마루에 밥상을 차리고 아버님, 어머님, 친구, 친구의 동생, 나 다섯이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 술을 너무 좋아하시는 아버님이 전날의 과음으로 인해 아직 숙취 중이셨는지 하신 말씀을 또 하고, 또 하신 말씀을 다시 하고 재방송에 재방송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속으로 저게 몇 번째 하시는 말씀인지 헤아리고 있는데,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친구의 어머님이 반기를 드셨다.

"에, 말이요, 아까도 했던 말이란 말이요. 그만 좀 하란 말이요. 으째서 한 말을 하고 또 하고 한단 말이라요. 참말로 듣기 싫네잉."

아버님은 그랬냐고, 물어보시더니 잠잠해지셨다. 그러다 한 오분쯤 지났을까. 또다시 그 얘기를 꺼내셨다. 나는 제삼자여서 그랬는지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서 배를 잡고 있는데, 두 딸과 어머님은 참을 수가 없는 화가 돋우었든지 아버님께 불 같이 화를 냈다. 특히 어머님이 목소리가 커져서

"에, 말이요, 금메, 그만 한담서? 와 그라요? 시방? 듣기 싫단 말이요!"

하면서 손을 휘둘렀는데 식사 중이라 손에 들린 젓가락이 휘둘리면서 어떻게 아버님의 뺨을 찌르게 되었다. 이내 굵은 핏방울이 찔린 곳에서 뚝뚝 떨어졌다. 우리는 놀래서

"어머, 피!"

하며 아버님을 쳐다봤다. 우리의 놀랜 외마디와 눈동자를 보고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아버님, 뺨을 쓱 훔치시더니 느리게 느리게 한 말씀하셨다.

"으메, 이 사람이, 사람 치네잉! 피 나부네잉. 왜 피를 나게 하고 근당가잉."

그 와중에도 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데,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계시는 어머니와 슬쩍 웃으면서 그런 어머님께 농을 건네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한 폭의 정지된 화면이 되어서 내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여름휴가를 떠올리면 과실수가 마당 앞과 뒤뜰에 심어져 있고, 집 왼쪽 텃밭에는 오이와 가지가 심어져 있던 속에 집의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젖히고, 시원한 샘물 사발에 받아다가 밥상 위에 올리고, 어머님이 맛깔나게 담은 간장게장에 밥 먹다가 느닷없이 벌어졌던 그 일이 두고두고 떠오른다.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렇게 발 동동 구르면서 정정해드려도 끝내 "명월어!"하고 부르시던 그날의 장난기 가득하던 아버님의 슬몃 웃던 모습도......

 

 

 

 

  

'마음을 나열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좋아하는 꽃  (0) 2006.10.20
부전자전  (0) 2006.07.28
따라 해보는 것들  (0) 2006.05.21
딸기  (0) 2006.03.23
애주가  (0) 2006.03.1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