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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열함

부전자전

by 눈부신햇살* 2006. 7. 28.

 

 

 

남편을 처음 봤을 때 밝고 깨끗한 모습에 아주 점잖아 보였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나의 이상형이었다. 마지못해 나간 소개 자리였으나, 어, 여태껏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내가 원하는 남자가 나타났을까, 하는 흐뭇한 생각이 마음속에 밀물처럼 고여 들었다.

 

그 인상은 연애하는 3년내내 불변의 진리처럼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언제나 비누 냄새가 퐁퐁 풍길 듯한 깔끔한 차림새와 까무잡잡한 피부의 나와는 대조적으로 뽀얀 살결이어서 더욱더 깔끔해 보이는데, 식당조차도 깔끔하지 않으면 절대로 들어가질 않으니 요모로 보나 조모로 보나 '깔끔함'의 극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만나러 오기 전에는 꼭 목욕(^^)을 하고 왔다니 깔끔해 보이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뽀얀 살결은 유전이어서 시누이들의 살결은 그야말로 백옥 그 자체이다. 눈부시게 하얘서 나 같은 검은 살결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어떻게 저렇게 하얄 수가 있다지. 신기해서 지금도 이따금 남편이 반바지 차림이거나 러닝셔츠 바람으로 있으면 살결을 쓰윽 쓰다듬으면서 "거참, 뽀얗다! 어찌 이리 뽀얄 수가!" 하며 감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피부의 질로 따지면 가무잡잡한 피부가 훨씬 낫다. 우선 부드럽기도 검은 피부가 더 보드라워서 실크 같다는 생각도 들게 하고, 하얀 피부보다 더 매끄럽고, 땀도 잘 나지 않거니와 땀이 나도 금방 마르는데 비해 남편의 피부는 여름만 되면 늘 끈적거려서 촉감이 영 꺼림칙하다. 다른 계절엔 팔짱도 곧잘 끼고 돌아다니는데, 여름이면 그 끈적한 팔의 느낌이 싫어서 팔짱을 끼었다가 놀래서 얼른 빼버린다. "으, 끈적거려!"

 

연애 시절, 깔끔해 보이는 하얀 피부에 줄이 제대로 선 연베이지의 면바지에 감색 티셔츠, 흰색 단화를 신은 남편의 모습은 그야말로 마음에 쏙 들었다. 나란히 서서 길을 걸을라치면 큰 키에 날렵한 맵시와 청결해 보이는 외모가 내 가치까지 올려주는 듯해서 뿌듯하고 벅차기까지 했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운 것이다.

 

3년의 연애 끝에 한방을 쓰게 되던 해, 집안의 첫행사가 있었다. 아버님의 육순 잔치였다. 시골집에 내려가서 일을 거들다가 조금 한가해진 시간에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더니 막내 이모님께서

"질부는 OO이랑 연애했어?"

하며 물어 오셨다.

"네."

입을 딱 벌리시더니

"몇 년?"

"만으로 3년요."

"3년씩이나? 거참,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 OO이가 연애를 했어. 그래, 말은 잘해? 질부한테?"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말, 아주 잘하는데요."

라고 대답했더니 벌어진 입을 더 크게 벌리시며

"그 참, 그래? 그러니까 연분은 따로 있다니까. 갸가 말을 참 안 하는 애여."

같이 옆에 계시던 큰고모님께서도 맞장구를 치며 혀를 내두르셨다.

"나가 참말로 OO이가 연애할 줄은 몰랐다. OO이가 연애를 다 했어?"

 

나는 오히려 그렇게 놀라워하시는 모습이 더 이상했다. 말을 얼마나 잘하는데, 왜들 그러시지.

그래도 연애할 때는 그렇게 짓궂거나 까불지는 않았다. 한방에서 먹고 자고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서서히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느닷없이 스트립쇼를 한다면서 옷을 하나 두울 벗어던지면서 엉덩이를 살살 돌려대지를 않나, 나를 끌어안고서 레슬링을 방불케 하는 숨 막히는 장난을 하지 않나, 시도 때도 없이 썰렁한 유머를 날려대지를 않나......

 

말이 좋아서 레슬링 비슷한 장난이지. 목을 조여대면서 연신 키득거리지만 졸림을 당해본 자는 알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숨 막히고 열이 받치는 장난인지. 숨 넘어가는 소리를 질러대도 재밌어서 그러는 줄 알고서 더욱더 열심인 것이다. 나중에 팔을 풀고 나면 너무 웃어서 나는 눈물인지, 화가 나서 나는 눈물인지 모를 울음이 쏟아지기도 했는데, 그러면 그까짓 것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엄살을 떤다고 또 놀려대는 것이었다. 달랜답시고 업어준댔다가 안아서 빙그르르 돌리다가...... 나열하기도 벅차다.

 

어쩌다 함께 어디를 갈라치면 남편이 뒤에서 온다 싶으면 늘 신경이 쓰인다. 똥침을 놀까 봐서이다. 지금은 물이 들대로 들어서 나 역시도 앞에서 남편이 걸어가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지만, 그때는 정말 화가 났다. 생긴 외양은 선비 같으면서 하는 행동은 어찌 그리 짓궂은지. 좀 생긴 대로 행동해 주세요,라고 나무라도 별 소용이 없었다.

 

명절 때나 어머님, 아버님 생신 때 시골에서 만나게 되는 한 살 차이라 친구처럼 지내는 둘째 형님에게 함께 앉아 전 부치면서 그런 저런 남편의 흉을 보면 형님은 절대로 믿으려 들지를 않았다.

"서방님처럼 점잖게 생긴 사람이...... 어디 그러려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자리에서는 점잖고 조신하게 행동하니 말을 하면 나만 허풍이 좀 심한 여자 취급받기 일쑤였다.

 

피는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 장난기는 작은 녀석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김장철에 시골집에서 검정콩을 콧속에 집어 넣어서 퉁퉁 불은 것을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서 강력한 콧물 흡입기로 뽑아낸 것은 집안에서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어머님 회갑 잔치 때에 유리문 사이에 손을 집어 넣어서 너덜너덜해진 손에다 빠졌던 손톱을 다시 얹고 여섯 바늘 꿰맸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그것도 네 살짜리가  전신마취가 아니라 부분마취만 하고 꿰맸다고 영웅담처럼 집안에서 두고두고 끄집어낸다.

 

그 끝에 꼭 따라오는 질문이 있으니 다름 아닌 "누구 닮아서 그래? 엄마, 아빠는 전혀 그러지 않는데."이다. 모르시는 말씀, 당신의 아들이, 동생이, 오빠가, 서방님이, 아주버님이 얼마나 짓궂다고요. 물론, 내가 그렇게 말씀드려봤자 아무도 믿으려 들지를 않을 테니 속으로만 그렇게 말을 한다.

 

아빠를 한치도 틀리지 않게 생김새까지 꼭 닮은 녀석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이 방  저 방 돌아다니고,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 씨를 능가하는 이상야릇한 표정을 능수능란하게 펼쳐도 집안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언제나 점잖고 얌전하다.

 

서른 중반에 이마가 훤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흰머리까지 삐죽삐죽 솟아나는데도 장난기만큼은 여전히 수그러들지를 않아서, 그 짓궂은 작은 녀석도 제 아빠 앞에서는 밀린다. 그럼 개구진 것의 원조를 따라잡으려면 아직은 무리이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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