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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열함

딸기

by 눈부신햇살* 2006. 3. 23.

 

(어디서 한 장 업어 왔습니다. 사진의 주인님 감사합니다.)

 

 

1박 2일로 출장을 다녀온 남편이, 출장을 간 곳이 시골집 근처라 시골집에 들러서 김장김치와 딸기 한 상자를 들고 왔다. 6시 30분쯤에 전화벨이 띠리링 울려서 받으니 짐이 많으니 얼른 짐 가지러 나오란다. 큰 녀석은 영어학원에 간 시간이고, 작은 녀석은 있어도 힘쓸 나이도 아니지만 2박 3일로 수련회를 간 터라 혼자 있던 나는 냉큼 뛰어나갔다. 달리면서 "으, 추워, 외투 걸치고 나오는 건데."라고 혼잣말을 한다. 나이 먹는 증상 중의 하나가 혼자서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일 거다.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고, 나이 들면 혼자서도 잘 노는 것일까.

 

저만치 있는 남편에게, 하루 못 봤다고 째지게 반가워서가 아니라, 추워서 마구 뛰어가는데, 원래가 잘 웃는 사람인지라 웃으면서 마구 뛰어갔다. 어머니가 뽑아서, 다듬어서까지 보낸 한아름의 파와 커다란 스티로폴 박스에 가득 담긴 딸기 한 박스, 김치 한 통, 시골집의 닭들이 낳은 유정란 한 소쿠리를 보니 그중 가벼운 것이 파와 딸기일 것 같아서 얼른 두 개를 들었다.

 

나이 먹는 증상 중의 또 하나가 덜렁거리는 것인데(한 꼼꼼하던 나였건만...), 덜렁덜렁거리면서 앞장서서 걸어오노라니 뒤에서 날아오는 지청구.

"딸기 떨어진다. 잘 좀 들고 가라."

"뭘, 얼마나 조신하게 들고 가고 있는데. 어디 딸기가 떨어져?"

하며 내려다보니 쬐그만 거 하나 떨어졌다.

 

들어와서 씻지도 않은 딸기 몇 개를 집어 먹는다. 원래 딸기란 게 씻으면 당분이 물에 씻겨 나가서 덜 달다. 고로 시골의 딸기밭에서 막 따먹는 딸기가 최고로 맛있다.

 

남편과 살림을 차리던 해 봄에 첫인사 드리러 갔을 때도 딸기 수확하느라 한창 바쁘실 때였다. 시골집의 불문율은 딸기 수확이 한창일 때 절대로 행사를 치르지 않는 거다. 그래서 둘째 형님, 나, 동서네는 딸기철을 지나 모두 6월에 결혼식을 치렀다. (그래서인지 공교롭게도 형님네 작은아이만 빼고 다섯 명의 아이들이 모두 3월생이다. 큰 형님은 몇 월에 결혼식을 올린 지 모르지만, 그때도 딸기농사를 지을 때였고, 큰 조카 역시 3월생이다. 그래서 모두 여섯 명이 3월생.) 이번에 결혼 50주년 금혼식 기념으로 금강산 구경 가시는 것도 딸기 철이 끝난 5월 말쯤에 가시기로 했다.

 

그래서였는지, 한창 바쁜 딸기철에 인사를 드리러 온 당신의 셋째 며느리감과의 첫 대면에서 별말씀 없으시다가 무겁게 입을 떼며 한 말씀하시기를  "엉덩이가 저리 쪼삣해서 애나 낳겠어." 하면서 방을 냅다 하나 내줘서 둘이서 한방에서 같이 잤다.

 

그다음 해에는 큰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하느라고 그냥 그렇게 딸기 철이 지나갔다. 큰아이가 두 살이 되던 다음 해 딸기 철에 인사차 시골집에 내려갔더니 저녁식사 중에 어머님께서 그러셨다.

"널랑은 한 보름 남아서 밥 좀 해주고 가라. 눈코 뜰새 없이 바빠서 집안꼴이 엉망이다."

이 순진한 며느리는 아무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다음 날 떠나가는 남편을 보니 왠지 콧부리가 시큰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나 혼자 보름 동안을 이 시골에서 어찌 보낼꼬...'

 

그렇게 시작된 시골에서의 한달.

아침에 일어나서 날만 좀 환해진다 싶으면 딸기밭으로 나가시는 부모님이 한참 일을 하시다가 7시쯤 집으로 아침 식사를 하러 오시기까지 아침을 짓고, 점심은 딸기밭에 나가서 딸기농사 돕다가 비닐하우스에서 간단하게 밥만 새로 하고 싸간 반찬으로 때우고, 저녁 무렵에는 부모님보다 조금 빨리 돌아와서 저녁을 짓고, 아침에 널고 간 빨래들을 걷어서 개키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편은 주말이면 내려왔다가 일요일 저녁 차로 올라가곤 했다. 어쩌다 볼 일이 있어서 내려오지 못한 주말이면 다음 주말까지 2주 동안을 못 보게 됐다. 일주일 만에 봐도 무척 오랜만에 보는 듯한데, 2주 만에 볼라치면 없던 정까지 새록새록 돋아날 판이었다.

 

토요일에는 오전에 집안일을 하다가 점심 무렵에 정자나무 아래서 아이랑 한들거리며 남편을 기다리곤 했다. 부모님께서 그리 하라 했다. 남편 오면 밥 차려 주고 같이 들로 나오라고.

 

남편이 버스에서 내리면 아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 손을 잡고 시골집에 들어서기가 바쁘게 남편이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오랜만에 보니 한창 서로 좋을 나이의 젊은 부부라 할 얘기도 많건만 눈치 없으시고 정은 많으신 아버님이 꼭 나타나셨다.

"000 왔냐?"

그러면 서로 껴안고 있다가도 화들짝 놀라며 얼른 떨어지곤 했다.(이거 너무 에로틱적으로 흐르나... 흠흠...)

 

그렇게 한 달쯤 됐을까. 주말에 내려온 남편이 그랬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그만큼 했으면 됐지."

순간 양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쑥 돋아나 와서 어디라도 날아갈 듯했다.

다음날 점심 먹고 정자나무 아래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들에 계셔야 할 아버님이 헐레벌떡 숨 가쁘게 뛰어 오셨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놀란 눈을 하고 바라보니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하신다.

"네가 간다고 하니 내가 어떻게나 마음이 이상한지......"

말을 끝맺지 못하시고 눈물을 훔치신다.

"아버님이 그러시니까 저도 눈물 나잖아요......"

마주 우는 나를 남편은 웃으면서 바라보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멀뚱멀뚱 바라봤다.

 

그 해 유월에 우리보다 일 년 늦게 둘째 형님네가 결혼을 하고, 이듬해 3월에 출산하고, 그리고 그다음 해에 두 며느리가 같이 밥을 했다. 형님은 시골에서 성장을 하고 성인이 되어서 객지로 나간 터라 일머리가 밝았다. 도시에서 성장해 회사만 다니다가 온 나하고는 전혀 달랐다. 어머니는 그런 둘째 형님을 참 많이 이뻐하시고 흡족해하셨는데, 사사건건 비교되는 나는 참 죽을 맛이었다.

"재원이 너는 큰집에 큰며느리로 안 가길 천만다행이다."

하시는 말씀에 기죽지 않고 한마디 했으니

"그래서 셋째 아들에게 왔는데요."

 

그래도 아버님으로부터는 특별대접을 받았다. 행여 딸기바구니라도 나를라치면 손사래를 치며 만류하셨다.

"에이, 놔둬. 놔둬. 저기 앉아 있어."

그럼 여지없이 어머님의 날카로운 눈치가 아버님께로 날아왔다. 그런 아버님 이건만 둘째 형님에게는 예전 양동이로 물 나를 때 쓰는 물지게처럼 생긴 딸기 바구니 나르는 지게에다 딸기를 나르라고 하셨으니 나는 어머니 때문에 서럽고 둘째 형님은 아버님 때문에 서러웠다.

 

큰 형님은 항상 모든 일에서 일찌감치 열외였다. 왜냐하면 남편이 군인이면 마누라도 군인이기 때문이다.(굳이 무슨 말이냐고 묻지 마시라...)

 

그 일을 졸업한 건 큰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고부터다. 남편은 혼자서 밥을 끓여 먹건, 죽을 끓여 먹건 자취 경력을 믿거라 하시는 건지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시더니 아이가 유치원에 빠지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이유라 정당하게 그 일에서 빠질 수 있었다. 대신 딸기 철에 꼭 한번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서 주말과 일요일 열심히 도와 드리고 온다.

 

막내 동서는 맞벌이여서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됐고, 집안일이 서툴러도 다 이해가 됐고, 사랑을 받았다. 어느 때부턴가 어머님이 셋째 며느리도 이쁘게 봐주셔서 별 불만은 없다.

 

딸기농사를 지어서 좋은 건 부모님께는 목돈이 들어와서 좋고, 맛있고 싱싱한 딸기를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좋고, 아이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딸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고, 시골생활을 접할 수 있어서 좋다. 둘째 동생네 아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쌀나무에서 쌀이 열리는 줄 알았다니까.

 

올해 4월 토요일, 어느 하루에도 놀뫼의 새다리가 떠나갈 듯이 시끄러워지겠지. 아이들이 휘젓고 다니는 소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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