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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낙지 열 마리

by 눈부신햇살* 2006. 11. 10.

 

 

 

 

 

 

방금 낙지 열 마리가 들어왔다.

5시 반쯤 아이들은 농구 경기를 보러 간다고 부천 경기장에 갔다. 그 근처에서 퇴근 후 운동을 하던 남편이 경기가 끝나면 아이들을 태워서 집에 온다고 했다.

느긋하게 밥을 안치고 두부를 부치고 방을 닦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초등학교 동창인 고향 친구이다.

"응."

하고 받았더니

"야, 너네 집이 부개역에서 머냐?"

하고 묻는다.

"아니. 한 정거장 차인데."

자기가 지금 부개역에 와 있으니까 부평역으로 얼른 나오란다. 시골에서 낙지가 올라왔는데 혼자 먹기는 너무 많은 양이니까 나눠 먹잔다.

"야, 그냥 니네 식구끼리 먹어."

말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다는데 박절하게 가라는 것도 그렇다.

"알았어. 나갈게. 남부역 방향으로 나와라."

하루 종일 체기가 있어서 부스스하게 화장도 안 하고 머리도 감고 나서 만지지도 않은 체인 그대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고 녀석 양손에 스티로폼 박스 두 개를 들고 나타났다.

얼마 전에 고향 친구 몇몇과 모여서 낙지를 먹는데, 이렇게 맛있는 낙지는 처음 먹는다고 연신 감탄사를 내지르며 먹었더니 그때도 고 녀석이 낙지를 자꾸만 내 앞으로 옮겨 놓았다. 오늘 친척이 낙지를 가지고 올라오자 그 생각이 났던가보다. 스무 마리를 가지고 오셨다는데 열 마리를 내게 덜어주고 가는 것이다.

쑥스럽게 웃으며 낙지만 냉큼 덜어주고 가는 녀석에게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도 한 잔 사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얼른 집에 가서 가족들과 맛난 저녁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녀석은 오래전부터 내가 자신의 첫사랑이라고 누누이 떠들어대던 녀석이다. 오랫동안 노총각으로 있다가 뒤늦게 결혼 날짜를 잡고서 동창회를 한다고 하길래 다른 여자 동창 하나와 나갔더니 그 녀석만 혼자 덩그러니 서 있어서 황당하게도 만들고, 결혼하던 날 "지금 제 첫사랑이 저기 와 있습니다."라는 엉뚱한 멘트를 날리기도 해서 어처구니없게 만들기도 했다. 삼 년 전부터 동창회에서 가끔 마주치면 "잘 살아. 잘 살아라."라는 말을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끄집어내어하듯이 했다.

 

그러나 녀석과 내가 단둘이 만나본 적은 딱 한 번밖에 없다. 녀석이 학교를 다 마치고 서울로 상경한 다음에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서 연락을 해 와 서울역에서 십몇 년 만에 얼굴을 봤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때에 편지 한 통을 받았던 것 같다. 내용이 무척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힘내라는 식으로 몇 글자 적어서 보냈던가보다.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마침 그때가 그 녀석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힘든 시기였고 내 편지는 그 녀석에게 큰 위안이 됐던가보다. 그때부터 나는 그 녀석의 첫사랑이 되었다. 그 후로는 편지를 주거니 받거니 하지도 않았건만.

 

저도 노총각이고 나도 노처녀일 때 이따금 얼굴이나 보자고 연락이 오면 냉정하게 거절할 수 없고, 그렇다고 엮이기는 싫어서 단짝 친구를 항상 대동하고 나갔다. 며칠 전에 다른 한 동창 녀석이 내게 자신을 만나러 올 때면 왜 혼자 나오지 않았냐고 물어서 그걸 몰라서 묻냐, 너랑 엮이기 싫다는 뜻이지,라고 대답한 적이 있는데,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 녀석에게 다정하게 대한 적이 몇 번이나 될까. 또 다른 동창 녀석이 늘 내게 빈 틈이 없어서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고, 지금 역시 바늘도 들어가지 않게 생겼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왜 나를 늘 좋게 봐주는지 모르겠다. 말도 무지하게 쌀쌀맞게 해 대는데.

 

낙지 열 마리를 부려놓고 어떻게 먹는지 모를까 봐 먹는 방법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황황히 돌아서는 그 녀석을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박하사탕 깨문 것처럼 싸한 것 같기도 하고, 가슴에 목도리 하나 두른 것처럼 따스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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