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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진다네 개구리울음소리가 와글와글 거리며 시작되는 여행스케치의 를 들으면 오래전 그날이 떠오른다. 풋풋하게 싱그럽던 스물두세 살 무렵의 어느 여름 저녁. 그날도 이렇게 개구리가 와글와글 마을 앞 논에서 귀가 따갑게 울어댔다. 나는 울적한 친구 옆에서 가만가만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불렀다는 것만 기억이 날뿐 무슨 노래를 불렀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원래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기도 했지만 내 딴엔 엄마에게 야단 맞고 울고 있는 친구를 달랠만한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위로의 말 대신 노래를 택한 것이었다. 저녁 바람은 제법 선들선들하게 머리카락을 해작이며 기분 좋게 불어왔고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어대는 개구리울음소리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늘엔 주먹만 한 별이 총총했던가. 아니 그 밤엔 별이 보.. 2022. 7. 13.
빗속에 떠오르는 얼굴 이렇게 오랫동안 비가 내리면 잊고 있던 그날이 떠오른다. 오는 비를 다 맞고 비 맞은 생쥐꼴이 되어 찾아갔던 친구네 집. 어쩌면 그렇게 어수룩했는지. 잠깐 내리는 소나기였으니 처마 밑에서 잠깐 비를 피하다 그친 다음에 갔어도 될 것을. 그리 고지식하게 교복과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다 맞고 갔던가. 초인종 소리에 대문을 열어 주던 친구의 커다랗게 놀란 눈과 그 친구의 엄마와 할머니, 동생들의 한결같이 똑같은 표정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른다. 부리나케 건네주는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고 그런 꼬락서니인 것이 창피해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차려주는 따스한 밥상 앞에서 어색하게 밥을 먹었다. 비 오는 날의 추억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될 즈음 새로 전학 온 짝꿍과 더 .. 2007. 8. 8.
내게 반하셨나? 아무리 생각해도 할머니는 내게 반하신 게 분명하다. 일전에도 내게 그리 말씀하셨다. 오늘도 시내에 나가려고 또각또각 걸어가는 내게 맞은편에서 오시던 할머니께서 엇갈려 갈 때쯤 발걸음을 멈추고 굽은 허리를 살짝 펴시더니 감탄한 빛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참 이삐다. 그렇게 입으니까 참 이뻐! 아이고, 참, 너무 이삐다!" 순간, 내 입이 귀에 가 걸리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유쾌한 기분이 순식간에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호호호........." 할머니도 눈을 초승달로 만들며 마주 웃으셨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아주 만족스러운 모습이어서. 웃음으로만 답하고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송구스러워서 한마디 덧붙였다. 고개를 꾸벅하면서. "감사합니다!" 할머니도 그냥 가시지 않고 기쁘게 답.. 2007. 6. 18.
공들임 이 나무가 계수나무란다. 물론 내 솜씨는 아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스크랩을 허용해 놓았거나 오른쪽 마우스를 사용해도 되게끔 설정해 놓으면 가끔 하나씩 돔바 온다. 이 계수나무 단풍을 보고 순간적으로 놀랬다. 토끼가 달나라에서 방아 찧을 때 옆에 있었다던 그 나무라고? 야, 나무가 참 장난꾸러기 같이 생겼구나! 하트를 빵빵하게 부풀려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부채를 축소시켜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나뭇잎이 질 때쯤 머리에 떨어지면 내 머리에 떨어져 준 것이 황송스러울만치 어여쁜 빛깔과 사랑스러운 모양새다. 저 사진을 찍은 사람은 공들여 사진을 찍고, 그중에서 가장 나은 사진을 추려서 공들여 포토샾을 했을 것이다. 사진이 더욱더 돋보이게끔. 그렇게 해서 올린 사진이 나 같은 이가 구경하다가 문득 맘을.. 2007. 6. 1.
뜻밖이네! 작년, 5학년 내내 반에서 2등만 하던 녀석, 설마, 하는 마음에 "올해 너 1등 하면 내가 중학생 되어야 사주는 휴대전화를 사준다." 물론, 이 말은 그럴 리가 없다는 가정 하에 한 말이었다. 그 혹하는 말을 들은 녀석,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야,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무서워?" "응." 시험 보던 날, 풀 죽은 시무룩한 모습으로 뭔 시험이 그리 어렵냐고 투덜거렸다. "야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이틀만에 안도의 한숨은 걱정의 한숨으로 뒤바뀌었다. 세상에, 세상에 1등이란다. 초등학교 다닌 지 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외출했다가 들어서는 내게 녀석이 그런다. "엄마, 안 되셨어요. 저, 1등이에요." "정말? 그럴 리가?.. 2007. 4. 25.
이상한 사람들 며칠 전, 저녁 반찬거리로 정육점에 들러서 돼지고기를 사고 이어 슈퍼마켓에 들러 다른 찬거리를 사려고 가는 중이었다. 조금 넓은 골목에서 한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남자가 하나 걸어왔다. 방향이 이상한 것도 같아서 오른쪽으로 갈까말까, 아니 그냥 가도 피해 갈 수 있겠다,하는 생.. 2007. 3. 22.
썰물이 빠져나가듯... 이틀 전, 월요일에 작은녀석의 학교가 개학하고, 오늘은 큰녀석의 학교가 개학했다. 남들은 아이들이 개학하는 날, 홀가분한 마음이 하늘을 날 듯 한다는데, 나는 쓸쓸함이 가만가만 스멀스멀 모락모락 피어 올라온다. 그 기분이 갑자기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올라오자 문득 엄마도 이런 마음일까, 그래서 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친정에 들렀다가 오는 날이면 엄마가 쓸쓸하고도 쓸쓸한 얼굴로 동생네 가족이 함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동생네 네 식구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엄마 곁에 오롯이 남는데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큰소리로 웃었다. 뭐가 그렇게나 섭섭하냐고. 키울 때 살갑게 키우지도.. 2007. 2. 7.
보약 모처럼 월곶에 갔다. 지난주에도, 지지난주에도 코에 바람 좀 집어넣자고, 하다 못해 엎어지면 코 닿는 월곶에라도 가서 답답한 코에 바닷바람을 쐬주자고 말만 무성하게 하다가 지난주엔 피곤해서, 지지난주엔 또 기타 사러 돌아다니느라고 가지 못했다. 남편은 요즘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지난해 들어 부쩍 잦아진 출장이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져 객지 잠을 많이 자기 때문이다. 조금 예민하고 결벽증 비슷한 구석도 있는 성격이고 보면 객지 잠을 달게 잘 사람이 절대로 못 된다. 늘 출장 끝에 집에 오면 지난밤에 깊은 잠을 못 잤다며 객지에서 잘려면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깊은 수면을 취할 수 없었다고, 술자리에서 숙소까지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술이 머리끝까지 취한 날 밤이나 세상모.. 2007. 2. 5.
반전 행복만은 없는 거야. 오로지 아름다움만도. 찬란하게 아름답고 나면 꼭 그것이 뒤집어진다. 대가 없이 지나가는 일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순한 듯이 오로지 부드럽게만 감싸 안아 주는 게 있다면곧 꼭 그만큼 거칠음을 내보인다. 서로 거울처럼...... 중에서 - 신경숙 한때는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행복이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싹 안면을 바꾸고 후회와 실망과 낙담으로 둔갑할 때가 있다. 그것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는 느낌일 때가. 예전의 기쁨과 즐거움, 행복으로 바꾸어 보겠다고 버둥거릴수록 더 엉클어져서 버려야 될 헝클어진 실뭉치를 보는 낭패감. 매번 제대로 소통되지 못하고 남의 다리 긁는 식의 감정의 교류에 따라오는 피곤함.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일찍이 이렇게 .. 2006.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