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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보약

by 눈부신햇살* 2007. 2. 5.

 

 

 

모처럼 월곶에 갔다. 지난주에도, 지지난주에도 코에 바람 좀 집어넣자고, 하다 못해 엎어지면 코 닿는 월곶에라도 가서 답답한 코에 바닷바람을 쐬주자고 말만 무성하게 하다가  지난주엔 피곤해서, 지지난주엔 또 기타 사러 돌아다니느라고 가지 못했다.

 

남편은 요즘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지난해 들어 부쩍 잦아진 출장이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져 객지 잠을 많이 자기 때문이다. 조금 예민하고 결벽증 비슷한 구석도 있는 성격이고 보면 객지 잠을 달게 잘 사람이 절대로 못 된다. 늘 출장 끝에 집에 오면 지난밤에 깊은 잠을 못 잤다며 객지에서 잘려면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서 깊은 수면을 취할 수 없었다고, 술자리에서 숙소까지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술이 머리끝까지 취한 날 밤이나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무래도 객지로 나도는 날이 많다보니 술도 많이 마시게 되고, 잠자리도 불편하여 몸이 자꾸만 허해진다고 녹용이나 한번 먹었으면 싶다고 했다.

"그럼 난, 홍삼엑기스."

하고 장난스레 말을 받았더니

"당신은 집에서 편안하게 잠자고 먹는데 홍삼엑기스가 왜 필요해? 더군다나 남편이 듬뿍 이뻐해주기까지 하는데."

가느다란 전형적인 동양인, 아니 친가의 내력인 외까풀의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아이고, 그래, 치사해서 안 먹는다, 안 먹어. 녹용 많이 먹고 천년만년 살아라. 나는 일찌감치 꼴까닥 할 거니까 새 마누라하고 알콩달콩 깨 볶고 살아."

목소리를 높여서 심사가 살짝 꼬인 대답을 했다.

 

사실은 먹으라고 해도 안 먹을 텐데, 남편의 말처럼 집안에서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고, 어디 불편한 곳도 없고, 가끔 과민성 대장 증세처럼 배탈은 잘 나지만, 일 년 삼백 육십 오일 중에 감기에 걸리는 날도 손으로 꼽을 정도이니 굳이 먹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혹시나 하고 떠보는 말에 그렇게 대꾸하니 서운해서 말이 엇나갔다. 그래도 한 4십만 원 정도 통장에서 뽑아서 줄 테니 지난번 먹었던 곳에 주문하라고 하자 좀 더 생각해 보고 먹겠다고 했었다.

 

그러던 것이 출장과 시골 학교의 행사에 다녀오면서 녹용 달인 것 한 박스를 들고 왔다. 남편의 모교인 시골 학교가 학생 수가 턱없이 적어서 폐교된다고 오래전부터 말이 나왔던 것이 시골에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졸업생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문을 닫게 돼서 마지막으로 조촐한 행사로 마감한다고 초대장이 왔다. 출장지에서 회사 일을 마무리 짓고 시골집에 들러 학교의 행사에 참석했다가 올라오는 길에 시골집에서 가지고 온 꾸러미 속의 사슴 그림이 그려진 검은 약봉지들을 보자 궁금증이 확 치밀었다.

"이거 녹용이야? 당신이 주문했어?"

"아니, 엄마가 사슴 한 마리 잡아서 약재 넣어서 달였대. 한 마리 달이니까 꽤 많이 나와서 집집마다 한 박스씩 나눠줬다는데."

"흐음, 소원 풀었네? 좋겠다. 얼마나 더 튼튼하고 씩씩해질꼬. 에고, 며느리 몫은 없대?"

"시골집에 전화해줘? 며느리 몫은 왜 안 주는데요? 하고 물어볼래?"

"됐네."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얼른 데우란다. 전자레인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전자레인지를 사지 않았다. 그래서 보온 밥솥의 뚜껑을 열고 접시 위에 두 개의 약봉지를 얹어 놓았다가 십 분 후에 약간 뜨겁게 데워진 약봉지의 귀퉁이를 조금 잘라낸 후 머그 컵에 따라서 거실로 들고나갔다. 컵이 두 개인 것을 보자 남편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도 먹어?"

"응, 무슨 맛인가 보게." 

무척 썼다. 하지만 약이라고 생각하니 그 한 컵에 힘이 조금 솟는 것 같기도 하는 간사스러운 마음이 살짝 들었다. 그러니 세상살이 맘먹기 달렸다고 하겠지만.

 

어제 일요일 아침, 식사 후에 역시나 두 개를 데워서 머그컵에 따라 나란히 들고나갔더니

"아니, 당신은 왜 또 먹어? 시골집에 전화한다. 당신 시어머니한테 이른다. 약 뺏어 먹는다고."

순간, 얼마나 치사하고 또 치사한 지

"아니, 이제 겨우 두 개 맛봤구먼, 뭘 이른다고? 그래, 일러라, 일러. 아니다. 내가 먼저 전화해서 따질까 보다. 어머니, 그래 보약은 꼭 아들만 먹어야 돼요? 하고."

"아마도 그런다고 할 걸. 개수 적어놔야겠다. 먹는지 안 먹는지 확인하게."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한참 웃었는데, 뒷맛이 꼭 뭐 잘못 씹은 것 마냥 씁쓸해져 왔다.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하던 것이 어느 시점에서 확 상해 버렸다. 당연히 삐쳤다. 입을 쭉 내밀고 쫑알대기 시작했다.

어떻게 당신은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가 있냐? 가족이 다 같이 건강해야지. 당신은 틈나는 대로 운동도 하면서 게다가 약까지 먹는다면 얼마나 건강하겠냐. 더 이상 건강해지려야 건강해질 수도 없겠다. 나도 보기 보단 약하다. 단지 감기가 잘 안 걸릴 뿐이다......구시렁구시렁,조잘조잘,투덜투덜.......

 

큰녀석이 옆에 오더니

"에이, 엄마는 그게 그렇게 기분 나빠요? 장난인데......"

이 녀석도 남자라고 남편 편이며, 남자들이란 이상하게도 감정 상하게 말해놓고서 삐치기라도 할라치면 꼭 장난인데 밴댕이 소갈딱지로 삐친다고 난리법석이다.

여전히 투덜대며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남편이 와서 뒤에서 안더니 토닥토닥거린다.

"에이, 장난인데, 뭘 그래."

그래도 같이 먹자는 소리는 절대로 안 한다. 난 그 말 한마디만 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말이다.

 

교회에 다녀온 후, 점심으로 떡볶이를 한 냄비 가득해서 먹었다. 남편의 식성은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젓갈류나 장아찌류 같은 저장 식품은 손도 대지 않는 반면 아이들 먹거리 같은 떡볶이나 계란말이, 샐러드류는 좋아한다. 식사 후에 바다 구경 가자고 했더니 아이들이 발을 뺀다. 방학 숙제도 해야 하고, 또 다른 무엇도 해야 하고, 이유가 많다. 둘이서라도 가자 했는데, 어쩐 일인지 내 눈이 자꾸 감겨오고, 남편도 바다 구경보다는 낮잠이 더 당길 것 같아서

"낮잠 잘래?"

했더니 그러면 그러자고 해서 나란히 드러누웠다. 한 삼십 분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남편도 잠든 것 같지는 않다.

"잠 안 와?"

"응."

"그럼 우리 예정대로 바다에 갈까?"

"그러자."

그래서 둘이서만 길을 나섰다.

 

월곶에 내려서니 짭조름한 갯내음이 확 끼친다. 식당 앞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손동작이 요란하다. 바람은 잠잠하고 햇살은 따스해도 외투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싸늘한 공기 때문에 옷깃을 꼭꼭 여몄다. 남편의 팔짱을 끼고 타박타박 꽤 먼 길을 걸어서 월곶에서 소래로 넘어갔다. 월곶은 한산한데 소래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예전에 협궤열차가 다녔다는 좁은 다리 위도 사람들로 넘쳐난다. 시장 안은 더욱더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걷는 것이 아니라 떠밀려 간다. 붐비는 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 부부는 아마 한동안은 또 소래에 오지 않을 것이다. 사람 멀미 나게 어지러운 시장통에 질려서.

평일의 한가한 시간대에 온다면 구경할 만할 것이다.

 

사람들 틈에 끼여서 소라 2 키로와 생굴을 한 근 사 왔다. 갯가에서 태어났고, 한몇 년 살았음에도 어쩐 일인지 나는 비린 것보다는 네 발 짐승의 살을 더 좋아하는데, 내륙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자란 아이들 입맛에도 영 별로인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쓴 약을 삼키듯 한 점 한 점 갖다가 먹는다. 그래도 큰녀석은 굴을 제법 갖다 먹는데 작은녀석은 비린내가 나서 못 먹겠단다. 대신 소라는 그나마 낫다고. 아이들 식성 같은 남편은 아이들과 달리 굴과 소라를 맛있어한다. 못다 먹은 것들은 내일 골뱅이처럼 무쳐야겠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 남편은 출근 준비를 마치더니

"약 데웠어?"

하고 묻는다. 머그컵에 따라다 줬더니

"앗 뜨거워! 얄밉다고 아주 뜨겁게 데워왔지?"

미운 소리를 한마디 하며 그 끝에 내 눈치를 살피며 문을 나섰다.

나는, 오늘도 역시나 기대했던

"당신도 먹어."

라는 말을 듣지 못해서 살짝 삐쳤다.흐흐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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