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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열함

빗속에 떠오르는 얼굴

by 눈부신햇살* 2007. 8. 8.

 

 

이렇게 오랫동안 비가 내리면 잊고 있던 그날이 떠오른다.

오는 비를 다 맞고 비 맞은 생쥐꼴이 되어 찾아갔던 친구네 집.

어쩌면 그렇게 어수룩했는지. 잠깐 내리는 소나기였으니

처마 밑에서 잠깐 비를 피하다 그친 다음에 갔어도 될 것을.

그리 고지식하게 교복과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다 맞고 갔던가.

초인종 소리에 대문을 열어 주던 친구의 커다랗게 놀란 눈과

그 친구의 엄마와 할머니, 동생들의 한결같이 똑같은 표정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른다.

부리나케 건네주는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고 그런 꼬락서니인 것이 창피해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차려주는 따스한 밥상 앞에서 어색하게 밥을 먹었다.

비 오는 날의 추억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될 즈음 새로 전학 온 짝꿍과 더 마음이 잘 맞아서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아

서운했을 법도 한데 그해 여름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서울로 전학한 내게 가장 많이 편지를 보내왔다.

짝꿍은 나와 헤어지게 된 것이 너무도 슬퍼서 두 번째의 편지에 죽고 싶다는 말을 다섯 번인가 적어 보낸 것을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너무 걱정되니 안부 좀 알려달라는 부탁에 짝꿍의 집에 가봤으나 도무지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고등학생이던 오빠와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지금까지 모른다.

비 오는 날 비를 맞으며 찾아갔던 친구는 몇 년을 꾸준히 연락이 됐다. 가끔 서로 편지가 뜸해지면 질책하는 듯한

때로는 반성하는 듯한 편지를 보내오기도 하고, 친구가 사는 도시에 친척이 있는데도 한 번도 내려오지 않는 나를 두고

독하고 모진 구석이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건 내 사정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하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다. 어린 나이부터.

친구의 무심한 그 한마디가 내게 작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나는 독하고 모진 사람은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나를 몰라주는 친구에게 조금은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대신 친구가 방학을 이용해 서울로 몇 번 올라왔다. 편지로 언제 올라오며 자기가 머물 곳의 전화번호를 적어서 보냈다.

그렇게 연락이 되어 오랜만에 친구의 얼굴을 보기도 했다.

맨 처음엔 서울역에서 만났다. 역과 가까운 곳의 남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이런저런 사는 얘기를 했다.

생활이 너무 달라 가끔 놀라운 마음으로 가만히 앉아 있곤 했다. 고개만 끄덕이며......

두 번째는 돈암동에서 만났다. 친구의 친척집이 그곳에 있었다. 가까운 곳의 고대 캠퍼스를 거닐었다. 오래된 건축 양식의 학교가

참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가 그랬다. 자기는 서울로 대학교를 오고 싶다고.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이자 세 번째는 장안평에서 만났다. 앞의 두 번은 여름방학이었던 것 같은데, 마지막 세 번째는 눈이 흩날리는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 애가 교복 코트 차림으로 나타났다. 얼굴 표정이 눈발이 흩날리는 거리 풍경만큼이나 쓸쓸해 보였다.

공부가 잘 안 된다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해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재수한다는 편지를 끝으로 편지도 끊어졌다.

그 후로 얼마 동안 연락이 끊겼다. 오랫동안 편지가 끊겼다는 생각에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다.

외할머니가 사신다는 김제(방학 때면 김제에서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로 편지를 보내 보았으나 여전히 무소식이었다.

연락이 된다면 꼭 한번 만나보고 싶다.

남편은 어떻게 생겼으며 아이들은 몇이나 낳았는지 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인지......

지나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덤벙 덤벙대며 큰 소리로 목젖이 드러나게 환히 웃던 그 애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

큰 녀석이 1박 2일의 교회에서의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그제 저녁.

벨렐렐레~~~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 나 이제 끝났는데, 비 오는데..."

"그래서? 우산 갖고 오라고?"

한창 저녁 식사 준비 중이라 바빴다. 작은녀석이 있었지만 배려심이 좀 부족한 녀석인지라 귀찮아할 게 뻔하다.

"그냥 비 맞고 와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으면 안 될까? 비 맞는 쾌감도 있는데."

나는 은연중에 오래전 그 일을 떠올렸나 보다. 비를 쫄딱 맞고 가니 오가는 행인들의 눈빛이 따갑기도 했지만

비를 맞는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시원하기도 하고 짜릿한 것 같기도 하고 묘한 기쁨이 뒤따랐다.

녀석도 그걸 느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집과 거리가 그렇게 먼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대로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아직 어린 나이니까 덜 이상해 보일 것 아닌가.

아들은 순순히 대답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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