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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14

별이 진다네 개구리울음소리가 와글와글 거리며 시작되는 여행스케치의 를 들으면 오래전 그날이 떠오른다. 풋풋하게 싱그럽던 스물두세 살 무렵의 어느 여름 저녁. 그날도 이렇게 개구리가 와글와글 마을 앞 논에서 귀가 따갑게 울어댔다. 나는 울적한 친구 옆에서 가만가만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불렀다는 것만 기억이 날뿐 무슨 노래를 불렀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원래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기도 했지만 내 딴엔 엄마에게 야단 맞고 울고 있는 친구를 달랠만한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위로의 말 대신 노래를 택한 것이었다. 저녁 바람은 제법 선들선들하게 머리카락을 해작이며 기분 좋게 불어왔고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어대는 개구리울음소리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늘엔 주먹만 한 별이 총총했던가. 아니 그 밤엔 별이 보.. 2022. 7. 13.
빗속에 떠오르는 얼굴 이렇게 오랫동안 비가 내리면 잊고 있던 그날이 떠오른다. 오는 비를 다 맞고 비 맞은 생쥐꼴이 되어 찾아갔던 친구네 집. 어쩌면 그렇게 어수룩했는지. 잠깐 내리는 소나기였으니 처마 밑에서 잠깐 비를 피하다 그친 다음에 갔어도 될 것을. 그리 고지식하게 교복과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다 맞고 갔던가. 초인종 소리에 대문을 열어 주던 친구의 커다랗게 놀란 눈과 그 친구의 엄마와 할머니, 동생들의 한결같이 똑같은 표정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른다. 부리나케 건네주는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고 그런 꼬락서니인 것이 창피해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차려주는 따스한 밥상 앞에서 어색하게 밥을 먹었다. 비 오는 날의 추억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될 즈음 새로 전학 온 짝꿍과 더 .. 2007. 8. 8.
여름날의 추억 그리운 내 님 꿈에서나 뵈올 뿐 님 찾아 나설 때 님도 나서면 어쩌나 다른 밤 꿈에 님 찾아 나설 때는 같은 시간 같은 길에서 만났으면 - 꿈길 -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더냐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난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 베혀내여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날 밤에 구비구비 펴리라 황진이, 하면 명월이, 명월이, 하면 황진이가 떠오를 것이다. 외모로 보나, 풍류의 멋으로 보나 황진이의 발끝도 건드릴 수 없는 나이지만 내게도 '명월아!'하고 부르던 분이 계셨다. 그래서 그 부름이 황송스러웠냐 하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누누이 정정해서 부를 것을 말씀드렸.. 2006. 7. 22.
단풍비 올봄에는 이리 복사꽃이 화사하고, 개나리 진달래도 더불어 봄을 알렸더랬는데, 꽃 피던 봄도 가고, 무덥던 여름도 가고, 낙엽 지는 가을이다. 요 며칠 가을답지 않고 포근한 것이 마치 봄날 같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뭇잎은 바람이 한차례 불 때마다 봄에 꽃비 내리듯이, 겨울에 눈 내리듯이, 단.. 2005. 11. 4.
첫사랑 사노라면 누구든 어쩌다 한번쯤은 지나간 첫사랑을 떠올려보는 일도 있으리라. 불현듯 스쳐가는 바람에 떠올릴 때도 있을 테고,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여겨지는 일에서조차 연관지어져서 사소한 일상처럼 떠올리게 되는 일도 있으리라. 나는 남편의 첫사랑을 알고, 남편은 나의 첫사랑을 알고 있다. 남편을 소개 시켜주던 남편의 고향 친구는 그 무슨 심술인지, 악취미인지 물어보지도 않는 첫사랑 얘기까지 들려줬다. 덕분에 연애할 때 그 지나간 첫사랑으로 인해 크게 한번 싸웠다. 고향 근처의 도시로 나와 학교를 다니던 남편이 매주 첫사랑을 만나러 시골집에 내려 갔다던 말에 발끈해서 싸우게 됐다. 안절부절하며 나를 달래지 않았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그때 남편은 변변한 직장을 그만 두고, 변변치 않게 공부.. 2005. 8. 17.
만화에 대하여 나의 맨처음 독서는 만화책으로 시작되었다. 그전의 책이란 건 교과서가 전부였고, 교과서 외에 다른 읽을 거리로 접한 게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던 만화가게에서 읽었던 만화책이다. 그게 아홉 살이 끝나가는 겨울이거나 열 살이 시작될 즈음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만화방이란 널판지 몇 개로 .. 2005. 7. 26.
엄마가 싫어하는 것들 육심원 씨의 저 작품은 저렇게 밝은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전인권의 머리를 능가하게 부풀려 놓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커다란 귀걸이를 하고, 손톱은 마귀할멈처럼 길게 길러서 붉은색 메니큐어를 바르고, 눈두덩이는 한 대 맞은 듯 초록색 아이새도우를 바르고, 붉은 볼연지에 역시.. 2005. 7. 5.
영화에 대하여 영화를 맨처음 보았던 게 몇 살적이야? 나는 일곱살 무렵으로 기억해. 영화보는 걸 즐기던 엄마를 따라 맨처음 보았던 영화의 제목이 '꼬마 신랑'이라고 확실히 기억하는데, 그게 김정훈이 나왔던 영화였는지는 확실치 않아. 다른 영화도 많이 보았다는데 다른 영화도 떠오르질 않고...... 그 다음으로 .. 2005. 7. 1.
무료함 무료함 어린 날에 어른들은 들로 나가고 혼자서 빈 집을 지키노라면 알 수 없는 슬픔이 스멀스멀 덮쳐 왔다 텅 빈 마당, 텅 빈 동네에 뜨겁게 햇볕이 부서지고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여름 한낮 지나친 무료함에 어린 계집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장독대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닫었다 항아리에 가득 찬 간장에 얼굴을 비춰보고 그 속에 담긴 파란 하늘을 들여다보고 뒷뜰을 어슬렁거리다 무심한 풀을 짓뜯어 씹어보다 마당 한켠에 높게 쌓인 보릿대 낟가리 위에 올라가 동네를 내려다보다 아무도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방문을 확 열어 젖혀보면 서늘한 어둠만 존재했다 모두다 어디 갔는가 어디 숨었는가 무료함이 빚어내는 외로움에 눈물 한방울 흘러내리던 날도 있었어라. 2005. 6.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