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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열함

만화에 대하여

by 눈부신햇살* 2005. 7. 26.

나의 맨처음 독서는 만화책으로 시작되었다.
그전의 책이란 건 교과서가 전부였고, 교과서 외에 다른 읽을 거리로
접한 게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던 만화가게에서 읽었던 만화책이다.

그게 아홉 살이 끝나가는 겨울이거나 열 살이 시작될 즈음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만화방이란 널판지 몇 개로 투닥투닥 엉성하게 짜놓은 의자가
몇 개 있어서 그곳에 앉아 고개 숙이고 읽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지금처럼 만화책을 빌려주기도 했었는지는 워낙 어린 시절의
일이라 잘 떠오르지 않는다.

 

작은아버지가 하는 가게였으므로 나는 원하는 만큼
실컷 만화책을 공짜로 볼 수 있었다. 이것저것 뽑아보다 마음이 당기는 것이
있으면 코박고 열심히 읽었다. 그렇게 열심히 읽었건만
어찌 된 일인지 지금 선명하게 떠오르는 제목이라곤 '머나먼 길'이란 제목 밖에 없다.
코믹물이었는데, 제목에서 풍기듯이 익살스러움으로 가정의 화목함을 이끌던
삼촌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세상으로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당시는 제목의 뜻도 모르고 읽었는데, 왜 붙었는지도 몰랐던 그 제목이
왜 유독 기억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장난꾸러기 삼촌의 행동에 깔깔거리며 읽다가
뜻밖에 죽는 것으로 결말이 나서 그 슬픈 결말에 어리둥절해하며 슬퍼했든가.
간접적으로나마 최초로 겪은 죽음이어서일까,
비교적 내용과 그림이 정확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걸리버여행기'에서 영감을 떠올리지 않았을까,하는
만화가 있었다. 주인공 꼬마가 뜻하지 않은 일로 갑자기 엄지손톱만하게 작아져서
겪게 되는 황당무계한 일들. 역시 깔깔거리며 읽어서 잊히지 않고 기억에 남나보다.
귀신이야기도 읽었는데,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홍길동처럼 귀신이 출몰했다는 것만 기억에 남는다.

 

어느 겨울날, 방학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만화책에 코박고 있다가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라는 작은아버지의 말씀에
가게문을 열고 나오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는지, 온세상이 하얗게 변하고
하나둘씩 켜지는 거리의 불빛들이 참 따사롭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뽀드득뽀드득 발밑에서 밟히는 눈의 감촉을 느끼며 걷고 있는데,
레코드 가게에서 켜놓은 전축에서 '눈이 내리네'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눈오는 풍경과 어우러져 감미로운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지는 노래였다.

 

그후로 다시 만화와 친해지게 된 건 중학교에 들어가서이다.
입학해서 처음으로 짝꿍이 되었던 아이의 집이 만화가게를 했다.
물론 그전에도 '새소년'이라는 잡지에서 '유리의 성'이라든가,
'도깨비 감투''엉터리 발명왕' 등을 읽기는 했지만,
만화가게에서 만화책을 다시 보게 된 건 그때이다. 새삼스럽게 어린 날의 작은 아버지께서 하시던 만화가게의 풍경과 그 시절이 떠올랐다.


'태양의 투수'란 만화를 가장 재밌게 읽었다.
투수의 영광, 타자의 영광, 투수의 고난, 타자의 고난, 투수의 훈련내용,
타자의 훈련내용, 투수와 타자의 대립시 심리상태 등을 아주 잘 묘사한 책이어서
손에 땀을 쥐고 봤던 것 같다. 달랑 한 권짜리가 아니고 몇 권이 있었는데,
몇 권짜리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난다. 그 만화가 워낙 재밌어서
다른 야구만화도 들춰봤는데, 그 만화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쉽게도 친했던 그 아이와 사소한 오해로 틀어져서
말을 안하는 사이가 돼버려 만화책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 아이로 인해서 그 시절 우리가 보는 잡지는 '여학생'이니
'학생중앙'이니 '주니어'라는 걸 알게 되고, 그런 잡지를 빌려다 집에서 보다가
작은아버지에게 걸려 된통 혼났다. 그런 것은 막돼 먹은 아이들이나 보는 거라고 해서
작은아버지 몰래 이불 속에서 볼 것 다 봤다. 읽어보니까 별로 이상한 내용도 없었는데,
행여나 하는 노파심에서 단속을 하셨나보다.

 

다 성장해서 읽은 만화가 '캔디'이다.
티브이에서 하기도 했지만, 동생들과 만화책으로 빌려다 쌓아 놓고
눈물 질금거리며 설레이며, 가슴 찡해가며, 뭉클거리는 가슴을 안고 봤다.
그때의 '안소니''테리우스'는 정말 얼마나 멋있든지, 가슴이 저릴 정도였다.

나는 동경했다.
그런 지극한 사랑을 한 번 받아보기를...... 그렇게 멋있고, 잘 생기고,
나무랄데 없이 완벽한 남자에게서 그런 변함없는, 한결같은, 완벽한 사랑을 받아보고 싶었다.
단 한번만이라도 그런 사랑을 받는다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 소원은 이루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일이란 만화 속에나 존재할 법한 일이므로.
우선 나부터  외로워도 슬퍼도 절대로 울지 않는 '캔디'처럼 명랑하지도, 씩씩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 주위엔 '안소니'나 '테리우스'처럼 잘 생기고,
지극정성이며 일편단심일 남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아쉽게도 그저 그렇게 생긴 남자와 그저 그렇게 연애해서
그저 그런 아들 둘 낳고, 그저 그렇게 지금까지 살고 있다.

어쩌면 그저 그런 것이 인생이고, 현실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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