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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호의 사계(四季)

2월, 해빙기

by 눈부신햇살* 2023. 2. 17.

이곳 아산에 와서 생활하게 되면서 어느덧 신정호라는

둘레 4.8km짜리 호수의 사계를 세 해째(세월 참 빠르다) 지켜보게 된다.

크다면 크고 크지 않다면 크지 않은 이 호수는 사계절 내내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거의 매일 보는 호수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듯하면서 미묘하게 조금씩 달라져

자연의 신비로움과 오묘함을 느끼게 해 준다고나 할까.

 

며칠 전 퇴근해 온 남편이 꽁꽁 얼어붙었던 호수가 다 녹았더라고, 서울에서 며칠 머물다 온 내게 말했다.

바로 그다음 날 나는 운동 끝나고 집으로 곧장 오지 않고 얼음 풀린 호수를 보러 갔다.

차로 신정호는 물론이고 멀리 송악저수지까지 한 바퀴 돌며 보는

얼음이 풀린 호수의 풍경이 반가움을 물씬 끌어올렸다.

봄이 성큼 다가섰구나! 아니, 벌써 봄인가.

 

이제 해가 길어져 이른 저녁을 먹고 호수에 가면 캄캄한 어둠이 반기지 않고

서쪽 하늘 발그레한 노을이 우리를 반겼다.

풍경이 어둠에 묻히지 않고 그대로 보이는 것이 좋아서 공연히 들떠 조잘거리며

통통 용수철 튀듯이 걷게 되는 날이었다.

 

해빙기가 되면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 제목도 한 번쯤 떠오르곤 한다.

<해빙기의 아침>. 내용은 거의 다 잊어버렸음에도 그 책의 작가 한수산 씨와

<해빙기의 아침>이란 제목만은 또렷이 떠올라 해마다 신정호의 해빙기가 되면

그 책을 읽을 무렵 나의 푸르던 청춘도 덩달아 떠오른다.

그 무렵에 읽었던 박범신의 <죽음보다 깊은 잠>도 떠오르는데

죽음보다 깊은 잠은 얼마큼이나 깊은 잠일까 궁금해하던 기억까지 함께......

 

 

 

 

이월이         / 自我 진태원


다리 짧은 2월이
찬 겨울 길을 외로이 홀로 걸어서
손끝 놓지 않고 봄을 데리고 오는 2월이
시간이 걸려도 노록(勞碌)한 종종걸음
디딘 자국마다 흰 설 녹이며 포근히 밟는다

마중 나간 길목에 얼음아
아무리 얼어봐라. 이렇게 나
2월이 오는 길, 미끄러지지 않게
정 하나 들고 깨뜨리려니 시린 손이 얼겠는가

땀내가 배어들며 추위에 견디어 지친 다리 털썩
2월이 내 곁에 와닿을 때 내 남은 눈물 쏟으며
손이 발이 되고 발이 손이 되어 서로
'고생했다' 사랑스레 포옥 얼싸안으리.

 

* 다리 짧은 2월이란 표현이 기가 막히네.

 

 

 

 

2월  /  목필균

바람이 분다

나직하게 들리는

휘파람 소리

굳어진 관절을 일으킨다

얼음새꽃

매화

산수유

눈 비비는 소리

톡톡

혈관을 뚫는

뿌리의 안간힘이

내게로 온다

실핏줄로 옮겨온

봄기운으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햇살이 분주하다

 

이곳 다리 위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더니

청춘 몇몇이 몰려와 사진에 담기는 곳을 바라보더니

콩콩 뛰며 환호성을 지른다. 풍경이 너무 예쁘다고.

 

 

2월은   /  김희경

 

2월은

당신 같은 달

 

간절하지만

너무나 짧은...

 

해마다

하루만 더, 하루만 더를

뇌이게 하는 달

 

무심한 당신의 스침은

아쉽도록 아프기만 하지만

 

이 마음 견뎌보라 하시듯

놓으면 보이리라 하시듯

너머에서 기다리시는

당신의 환한 미소

 

'너무나'로는 턱도 없이 맑아서

턱을 지워내며

또다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달

 

2월은

당신과 나 사이에

나와 당신 사이에

눈 오고 비 오고 바람 불어도

더 단단할 사랑의 다리를 놓는 달

 

 

 

2월은 홀로 걷는 달  /  천양희


헤맨다고 다 방황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미아리를 미아처럼 걸었다
기척도 없이 오는 눈발을
빛인 듯 받으며 소리 없이 걸었다
무엇에 대해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어 말없이 걸었다
길이 너무 미끄러워
그래도 낭떠러지는 아니야, 중얼거리며 걸었다
열리면 닫기 어려운 것이
고생문(苦生門)이란 걸 모르고 산 어미같이 걸었다
사람이 괴로운 건 관계 때문이란 말 생각나
지나가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걸었다
불가능한 것 기대한 게 잘못이었나 후회하다
서쪽을 오래 바라보며 걸었다
오늘 내 발자국은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된다는 말 곱씹으며 걸었다

나의 진짜 주소는
집이 아니라 길인가?
길에게 물으며 홀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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