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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by 눈부신햇살* 2022. 7. 18.

 

여름을 멋있게 장식하는 전형적인  여름 하늘을 보며 오늘은 부여로 달려간다.

저 `테두리가 선명한 뭉게구름'을 보고 가만있을 내가 아니다.

`예쁘다'는 감탄사 열 마디쯤 예사롭게 여름 하늘에다 갖다 바쳤다.

 

심심산골 청정 지역 청양을 지나 공주시 유구를 지나

 

부여의 롯데아울렛에 갔다. 

점심도 먹고, 내 선글라스도 사주신단다. 오예!

그동안 짙은 색의 선글라스여서 옅은 색으로 골랐는데 나중에 살짝 후회됐다.

사물이 본래색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은 좋은데 햇볕 차단이 완벽하지 않은 것 같다.

 

 

 

계백장군 동상의 뒷모습을 보며 교차로를 돌아 쭉 올라가서

 

정림사지에 도착했다. 주차장 옆으로 보이는 정림사지 박물관.

 

 

 

탑을 만나러 가는 길 양옆으로 연못이 있고,

 

 

 

넓은 정림사지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은

멀리서 보면 그다지 커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웅장함이 느껴진다.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도 떠오른다.

 

탑은 불에 그을린 자국으로 거무튀튀한 부분이 있다.

백제 멸망 후 모든 것을 7일 밤낮으로 불태웠는데 이 석탑만이 유일하게 남았다고 한다.

 

정림사지에 있는 백제의 5층석탑. 국보(1962.12.20 지정). 높이 833㎝.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며, 석탑의 구조는 기단 위에 탑신부가 있고 상륜부는 복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졌다. 기단은 단층으로 얕으며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개의 우주를 별석으로 세우고 그 사이에 2매의 면석을 끼웠는데, 우주는 목조건축의 기둥에서처럼 위는 좁고 아래는 넓게 표현되어 있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1층 탑신에 "大唐平百濟國碑銘(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고 새겨놓아 당시의 수난을 엿볼 수 있다. 2층의 옥신 높이가 현격히 줄어들었지만 3층부터는 체감률이 완만하다. 옥개석은 얇고 넓으면서 끝이 약간 반전되어 있고, 층급받침은 2단으로 얕게 표현되어 있다. 이로 인해 정림사지 탑은 큰 규모의 석조물이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주며, 마치 다층 누각 형태의 목조건물을 보는 듯하다.

 

일본에 현존하는 호류 사[法隆寺] 5층탑과도 비교된다. 이 석탑은 목조를 석조로 변형해 만든 것으로 익산 미륵사지석탑과 함께 백제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석탑 연구의 매우 귀중한 예이다.

- 다음백과에서 발췌

 

 

정림사지 오층 석탑 탑신부에 소정방이 하수량(賀遂亮)에게 글을 짓게 하고, 권회소(權懷素)가 글씨를 새기도록 하였는데 제목은 전서체, 본문은 해서체로 쓰여 있습니다. 1층 탑신 1면부터 각기 24, 29, 28, 36행으로 각행은 16~18자로 크기는 4.5㎝, 2,126자며 내용은 당 고종과 신라 문무왕이 연합하여 사비성(부여)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왕자(융, 효)를 비롯하여 700여 명(사실은 12,000여 명)을 중국으로 압송하고 백제 땅에 5도독부를 두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백제에는 74만 호 620만 명이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이 백제를 정벌한 까닭과 출정한 당군의 편성 및 당나라 장수들에 대한 칭송과 더불어 의자왕의 실정을 새겼다고 합니다. 위 글자는 660년 8월 15일에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새겨진 소정방의 승전비문(勝戰碑文)입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새겨 놓았다는 글씨를 찾아보았는데 세월이 흘러

많이 흐려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금당지는 부처를 모시던 전각이 있던 곳으로 석탑 기단에서 북쪽으로 양 15m 거리에 있다.

고려시대의 기단은 백제 때의 기단을 재활용하였다. 

금당지의 하층 기단에는 동쪽에 곳, 서쪽에 4곳, 남쪽에 6곳, 북쪽에 7곳의 적심석이 남아 있었고,

기단 내부는 한 곳에서 적심석이 확인되었다.

적심석 배치로 보아 금당은 툇간을 포함하여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로 추정되며,

정면 18.75m, 측면 13.80m 크기이다,라고 안내문에 쓰여 있다.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 보물 제108호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불상으로 화재로 인해 심하게 마모되어 형체만 남아 있고.

머리와 갓은 훋에 복원한 것이다. 좁은 어깨와 가슴에 올린 두 손의 표현으로 미루어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지나불상으로 짐작된다.

대좌은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단정하고 균형감 있는 조각 솜씨를 엿볼수 있다.

남원 만복사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라고 안내문에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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