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늘 그렇듯이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갔다.
출발할 때 환하던 하늘이 호수 근처에 이르렀을 때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난 후 과연 비가 올 것인가 말 것인가,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저쪽 하늘에 맑은 기운이 있으니 비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산책로에 접어들며 보니 다른 많은 이들이 우산을 챙겨 들고 걷고 있었지만
비는 오지 않을 거란 확신으로 손을 가볍게 하고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무심코 바라본 반대편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비록 엷긴 하지만 쌍무지개다.
올여름에만 세 번째 보는 무지개다.
이제 막 피어오르는 무지개인 것 같아서 더 커지길, 그리하여 둥그런 반원 모양으로
선명한 무지개다리를 만들어 주길 원하였지만 딱 저기까지 피어오르다가 스러져 갔다.
산책로의 4분의 1 정도 걸었을 때 하늘이 심상치 않아졌다.
어, 어, 하며 당황해하는 사이 번개가 무섭도록 길게 번쩍이더니 천둥이 치고
이내 후드득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낭패람. 차 트렁크에 우산을 고이 모셔두고 오다니.
그제야 후회가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이미 늦은 일.
비를 피해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자고 하길래 난 3시 이후엔 커피 안 마신다고 했더니 팥빙수를 시켰다.
카페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질이라 하루 두 잔, 아침 점심 식사 후에 마시고
어쩌다가 드물게 한 잔 더 마시는 경우가 있지만 되도록이면 삼가고 있다.
팥빙수를 다 먹어가도록 비가 잦아들지 않았다.
팥빙수를 먹어서인지 냉방 탓인지 으슬으슬 춥기까지 했다.
조금 빗줄기가 가늘어지는 것 같아 밖으로 나갔다. 그만 집에 가자는 걸 우겨서 마저 걷자고 했다.
그건 미안한 일이었다. 어디쯤 가자 이내 다시 쏟아지는 비.
물러갈 것 같던 먹구름은 어림없다는 듯이 다시 진해지고 굵은 빗방울들을 쏟아부었다.
몇 곳의 정자에 들러 비를 피하며 이 호수 둘레에는 정자를 참 많이 만들어 두었구나, 생각했다.
어디 편의점이라도 있으면 우산을 살 텐데 이 호수 주변에는 카페와 식당만 있다.
그렇다고 또 카페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다.
신발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머리카락에서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으며,
티셔츠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희한하게 엉덩이 쪽은 젖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희한한 것은 이 정도의 비엔 엉덩이 쪽은 젖지 않는다는 것을 남편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엉덩이 쪽이 젖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 새 차가 나왔기 때문이다.
주문하고서 부품 조달이 안 된다고 5개월이나 걸려 나온 차를
빗물이 뚝뚝 흐르는 채 타서 좌석을 적실 수는 없는 일이다.
산책로를 4분의 1 정도 남겨두었을 때 거의 비가 그친 것처럼 보슬비가 내렸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완전히 젖지 않은 상태로 차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생각지 않았던 비 때문에 요즘엔 통 달리지 않던 남편이 달리기도 했으며
어릴 적 상의 탈의하고 쏟아지는 빗속을 달리면 굉장히 신났었다는 얘기도 듣고
비를 맞는다는 것이 그리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재밌기까지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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