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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산다는 일

by 눈부신햇살* 2006. 8. 31.


 

 

 

 

 

 

일찌감치 만나서 돌아다니다 조금 빨리 헤어져 들어가자고 해서 조금 이른 시간에 만났다.

신길역에서 9시에 보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10분 전쯤에 도착했다. 장이 시원찮은 체질을 유전적으로 타고난 나는 어제도 뱃속이 편치 않았다. 배를 문지르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기다리는 것에 영 소질이 없는 나, 그새 몇 분을 못 참고 친구에게 전화한다. 어디냐는 나의 물음에 오히려 벌써 왔냐고 반문한다. 다른 한 친구는 조금 늦을 거라고 했단다. 늦는 사람은 꼭 늦고, 빨리 오는 사람은 꼭 빨리 온다. 나는 약속시간에 정확하게 맞춰서 나오는 사람에게 늘 후한 점수를 준다. 그것은 생활습관이기 때문에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한 친구가 오고, 많이 늦을 줄 알았던 친구가 생각 밖으로 오 분 늦게 도착해서 마침 들어오는 전철을 타고서 동대문에 갔다. 그곳에서 다른 방향에서 오는 친구를 이십여 분쯤 기다렸다. 그 친구는 요즘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일 때문에 좀 바쁘다.

 

J와 또다른 J, H, 나, 넷이서 동대문의 상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 좁은 골목골목의 상가를 어찌 그리 꿰뚫고 있는지, 조리사 자격증만 여덟 개라는 친구는 공부하기도 바빠 시간도 없었을 텐데, 언제 그렇게 돌아다녔을까. 여느 때처럼 그 친구의 뒤꽁무니만 열심히 쫓아다닌다. 물론 입을 가만 놔둘 리 없다. 어쩌고 저쩌고, 뭐시라 뭐시라, 주저리주저리, 이러쿵저러쿵......(이래야 무병장수 한대요.)

 

보라색의 발목 부분에서 한번 뒤집어 접는 운동화가 예쁘다고 딸내미 준다고 하나 산다. H가. 딸이 없는 또 다른 J가 자기가 신겠다고 냉큼 따라 산다. 나는 아무리 싸도 운동화도 있고, 더군다나 얼마 전에 비싼 등산화까지 남편과 함께 커플로 산 터라 별 욕심이 일지 않는다.

 

신발 코너를 다 돌고 이번에는 옷 코너로 접어들었다. 예전에 나의 단짝, 나와 사귀는 줄 알았다던 O와 이십여 년 전에 자주 다니던 상가였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지방으로 시집가더니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그때는 이렇게 몇 년씩이나 얼굴을 보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이제는 어쩌다 한 번씩 이렇게 기억을 자극하는 일이 생기는 경우에나 떠올리는 얼굴이 되어버렸다.

 

굽 있는 신발을 신고 상가를 헤집고 다니려니 금방 발바닥이 아프고 종아리도 힘들다고 신호를 보낸다. 어디 가서 조금 쉬라고. 그런데 아그들이 에너지가 넘쳐나는지 쉴 생각들을 안 한다.

 

옷 값이 정말 저렴하다. 우리 동네에도 큰 지하상가가 있어서 다른 동네에서도 옷을 사러 올 정도라고 하는데, 몇 번의 구매 끝에 싼 것은 비지떡이라는 결론으로 요즘은 돈을 좀 더 주더라도 쓸만한 것을 사 입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혀서 지하상가의 옷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동대문 상가의 옷들은 더욱더 싸서 그 저렴한 가격에 맘이 확 당긴다. 연노랑색 블라우스를 만원에, 인디언 핑크의 긴소매 얇은 면티셔츠를 만원에, 진하늘색(아니 청록색인가.)의 긴소매 면티셔츠를 친구와 각각 오천 원에 한 장씩 샀다. 싸지만 옷감의 질과 디자인이 그리 나쁘지 않다.

 

그래도 남편이 보면 쓸만한 옷을 사지 그런 것 샀다고 뭐라 그럴 것이다. 하긴 나이를 먹으면 점잖은 디자인의 옷을 고르게 되고, 그런 옷들은 그렇게 싸지는 않다. 그래도 어디 차려 입고 갈라면 그런 옷들도 한두 벌 쯤은 갖추고 있어야 되는데, 정장 스타일의 옷보다는 캐주얼한 옷차림을 편하다고 선호하는 성격에 정작 차려 입고 갈 자리가 생기면 입고 갈 옷이 없다. 그때, 새미 캐주얼한 차림으로 나서면 남편이 "옷이 그것밖에 없어?"하고 물을 때가 있다. 그래도 정장이란 것은 또 그럴 때만 입게 되는 옷인지라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구색 맞춘 정장이 한 벌도 없다.

 

미로 같은 상가를 헤집고 다니다 배가 고파오자 예약을 해야지 이 상가 안의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단다. 얼마나 이곳을 다녔길래 그런 정보까지 다 알고 있을까. 상가 귀퉁이의 코딱지만 한 음식점에 가서 선금을 내고 예약을 하니 한 시간 반 후에 오라고 한다. 장소가 워낙 좁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 시간 반 후에나 오라니 장사가 그리 잘 되나. 하긴 쇼핑하고 있는 여자들을 어림잡아 세어봐도 식당 수가 턱없이 모자라다.

 

쇼핑도 끝나고, 식사도 끝난 후, 좀 쉬면서 수다를 떨자로 합의를 보고 길 건너 두타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숍에서 항상 그렇듯이 밥 보다 비싼 커피를 시켜 마신다. 우스운 것이 아이스커피라는 메뉴 밑에 다방 아이스커피라는 것이 떡하니 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가 보다. 나는 당연히 다방 아이스커피라고 씩씩하게 외쳤다.

 

서울 시내의 지리를 거의 꿰뚫고 있다시피 한  또다른 J는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나보다. 머릿속에 원형탈모증이 생겼단다. 몇 년 전 나도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더니 면역성이 떨어져서인지 느닷없이 오백원짜리 동전만하게 머리털이 빠져 나갔다. 그때는 짧은 커트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길 가다 행여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그 자리가 보일까봐 신경이 쓰이곤 했다. 친구 역시 원형탈모증이 생겼다는 것이 또 다른 스트레스로 작용하나 보다. 이 선배께서 조곤조곤 말해준다. 걱정할 것 없다. 피부과 안 가도 된다. 때 되고, 맘 편해지면 도로 말짱하게 원상복구된다. 맘만 편하게 가져라. 그래야 지금 네가 일년 내내 달고 있다시피한 감기도 떨어질 것이다. 운동도 적당히 해줘라. 나는 하지도 못하는 것들을, 지키지도 않는 것들을 조언이랍시고 뇌까린다.

 

스트레스는 피부에도 안 좋다. 눈 밑으로 거무스름하게 기미도 돋아났다. 피부색도 맑질 못하고 칙칙하다. 감기를 늘 달고 있으니 목소리도 언제나 맹맹한 콧소리가 난다. 섹쉬한대! 하고 장난도 쳐보지만 그 뒤로 아휴, 산다는 것이 뭐길래, 저렇게, 이렇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힘겨울 때가 있을까,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 친구의 사정으로 인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에 다음번 모임을 기약하며 돌아서 와서 일찍 퇴근해 온 남편을 붙들고 오늘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다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에고, 사는 게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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