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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이렇게 난처할 수가...

by 눈부신햇살* 2006. 6. 25.

 

< 고흐의 침실>

 

 

 

 

이따금 각자의 사정에 의해서 금요일에 드리는 가정예배를 다른 요일로 바꾸는 경우가 있다.

지난주 목요일 저녁에 남녀 연합 속회 예배를 드리면서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이번 주에는 평소처럼 금요일 아침에 드리는 걸로 알고서 모처럼 아침 일찍 깨끗이 씻고서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나 저제나 전화벨이 울리길 기다려도 전화벨은 잠잠했다.

'또 예배 날짜 늦추고서 내게만 연락하지 않았구나.'

생각하고 평상시에 시간 보내는 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기회만 되면, 아니 기회가 되지 않아도, 때로 어떤 구실을 만들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곤 하는 예배인지라 하나도 섭섭하지 않았다. 누가 날라리 신자 아니랄까 봐서.

다만 전화 연락을 미리 해주지 않은 점에 아주 조금, 병아리 눈물만큼 화가 날락 말락 했다.

소파에서 뒹굴며 티브이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대며 있으려니 9시 40분쯤에 띠리리리 전화벨이 울린다. 우리 속장 권사님이시다. 미리 연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시며

저녁때에 순서를 바꿔서 권사님 댁에서 남편권사님 속과 함께 남녀 연합속회예배로 드린다고 하신다. 그냥 바쁘지도 않고, 그리 열성 신자도 아닌지라 친절하게, 아주 친절하게, 전혀 하나도 화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럼 저녁 때에 뵙겠다,며 끊었다.

 

저녁에 남편은 회식이 있어서 귀가가 늦는다고 해서, 아이들 밥 차려 주고, 요즘은 식욕이 당기지 않아서 찐 감자만 한 알 먹고서 권사님 댁에 갔다. 가구점을 하시는 두 내외분 권사님만 참석하지 않으시고 모두 모였다.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로 함께 드리는 예배였다.

예배를 드리고 빵과 과일과 음료수를 마시며 다소 어색한 분위기로 얘기 나누다가 남자분 두 분이서 일어서기에 모두 다 함께 일어섰다.

두 분 남자분 중에 한 분은 중간에 다른 길로 가시고, 나머지 한 분은 같은 방향인지 계속 내 앞에서 걸어가신다. 혹여 내가 뒤에서 따라가고 있다는 게 신경이 쓰일까 봐 또각또각 나는 샌들의 발자국 소리를 최대한 낮게 내며 걸었다.

그러다 중간에 갈림길이 나오자 대로변까지 나가시는 것 같아서 나는 얼른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제야 맘 편히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가방을 앞뒤로 살랑살랑 흔들며 걸었다.

아직은 밤바람이 선들선들한 게 걸을만했다. 택시를 탈까 하다가 아까 교통카드가 미등록으로 나온다고 해서 집까지 걸어올 요량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지하철이며 버스며 멀쩡하게 되는 카드가 왜 택시만 안 된다고 할까...

 

골목길을 빠져나와서 대로변으로 나왔더니, 아, 글쎄, 아까 앞서 가시던 남자분이 턱 하니 서 계신다. 오 마이 갓! 이를 어째?

우습고 쑥스러워서 서로 인사를 다시 나눈다. 정말 이를 어째? 집까지 같이 가야 되나 보다. 교회로 철야예배드리러 간다는데, 나 같은 날라리 신자는 절대로 철야예배드리지 않으나 집이 교회 가는 방향이다. 말 몇 마디 나누고 같은 방향으로 계속 한 20 여분을 걸어갈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나는 슬쩍 발걸음을 늦춰서 뒤로 빠진 다음 느리게 느리게 걷는다. 앞서 가시는 분을 보니 뒷모습에서 내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한 10분쯤을 걷다 보니 그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편안한 마음이 되어서 가방을 앞뒤로 살랑살랑 흔들면서 경쾌하게 걸었다. 아, 그런데, 또 다시 횡단보도가 나오고 그분이 턱 하니 서 계셨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다른 방향으로 건너가는 횡단보도에 서 계신다는 거였다. 내가 지나쳐 올 때까지도 신호가 안 바뀌어서 여전히 서 계셨다. 다시 인사를 해야 해? 말아야 해? 망설이며 쳐다보니 그분도 나를 의식하고 쳐다보신다. 반사적으로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진다.

"안녕히 가세요."

습관적으로 미소도 띤다.

그 분도 반사적으로 얼른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이시며 인사하신다.

"아, 예. 안녕히 가십시요."

 

오늘 점심 먹으며 그 난처했던 순간을 얘기하니 배를 잡고 웃던 남편,

"그럴 때는 얼른 가게 같은 데 들어가서 구경하다가 나오는 거야. 틈을 좀 벌여서."

아, 바보. 나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 길에는 음식점과 카센터, 유치원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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