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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김장

by 눈부신햇살* 2005. 11. 30.

올해도 어김없이 200포기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차이라면 지난해에는 배추 포기가 커서 여섯 조각 나오는 것이 수두룩했는데, 올해는 네 조각 나오고, 더러는 반으로만 가른 두 조각짜리도 있다는 거였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는 수업이 없고, 동서도 주 5일제 근무라 근처에 사는 형님과 동서는 일찌감치 시골집에 가서 배추를 절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남편이 출근을 하는 터라 우리는 1시에 출발했다. 차가 막힐 것을 염두에 두고, 또 빨리 내려가서 거들 겸 점심은 김밥으로 간단하게 차 안에서 때우기로 했다.

 

다른 때에도 그렇게 급하게 갈 때면 가끔씩 들러서 김밥을 사가던 김밥집이 문을 닫아서 다른 집을 찾게 되었다. 대로변에 면한 가게였는데, 신장개업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들어가니 내 앞으로 아주머니 한 분이 두 줄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여덟 줄 주세요."

했더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란다. 의자에 앉으면서 남편에게 혹시 몰라서 문자를 보냈다.

<이제싸니좀기다려>

그 아주머니가 김밥을 받아서 가고 우리 것을 싸는데, 등 너머로 보니 김밥 싸는 솜씨가 영 서툴다. 가게를 신장개업했다더니 김밥 싸는 사람도 초보인가 보다.

"김밥 안 싸 보셨죠?"

물었더니 웃으면서 그렇단다. 진도가 안 나간다. 원래 선수들은 착착 말고, 김밥도 두 줄씩 착착 썰어서 얼른얼른 담아주지 않는가. 아주머니의 김밥 싸는 솜씨는 운동 신경 둔한 나보다도 더 느리고 느리다.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된다.

'어, 이러면 우리 신랑 승질 나는디...... 성질 급해서 못 기다리는디......'

아니나 다를까 에릭 클랩톤의 'Tears in Heaven'이 터진다. '허니'라고 뜬다.

수화기를 열자마자 말도 듣지 않고 나부터 말한다.

"어, 조금 기다려야 돼. 지금 싸고 있어."

"아니 김밥 싸는데 뭐 그리 오래 걸려. 차라리 밥을 사 먹고 가겠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그렇게 요령껏 끊고 쳐다봐도 아직도 김밥은 네 줄째이다. 어라, 게다가 밥까지 떨어졌나 보다. 주방으로 밥 푸러 간다. 나만 마음이 조급하고 조급하다.

그때 문 여는 소리. 들어서는 낯익은 얼굴.

"어, 성질 급한 우리 신랑 와붔다!"

"아니,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지금 싸고 있잖아. 아줌마가 김밥을 별로 안 싸 보셨대."

화가 나서 얼굴을 붉은색으로 바꿨다, 푸른색으로 바꿨다, 잘 생기지도 않은 얼굴을 구겨서 더 못 생기게 만들더니 확 문을 밀고 나가 버린다. 그 사이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셔서 잔치국수 시켜서 다 드시고 가는데도 김밥만 여전히 진도가 안 나가고 제자리다. 미치겠다.

다시 'Tears in Heaven'이 울린다. 역시 '허니'라고 뜬다. 폴더를 제쳤더니 대뜸 화난 목소리가 터진다.

"그냥 와!"
"아니 어떻게 그냥 가? 다 됐어."

아주머니 통화 내용 들으시더니 서툰 솜씨에 마음만 급하셔서 손까지 떠시며 허둥지둥거리신다.

어떻게 어떻게 간신히 싸서 받아 들고 차에 가려는 순간, 다시 울리는 벨.

"아, 스트레스받아."

차에 올라타니 대뜸 화를 벌컥벌컥 낸다. 나도 화가 마구마구 솟구친다.

둘이서 소리 지른다. 김밥을 아이들에게 건네준다. 둘이서는 싸운다.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김밥을 조심스럽게 먹는다. 우리는 여전히 싸운다.

나, 갑자기 눈물이 솟구친다. 운다. 에라, 아예 소리 내서 운다. 엉엉......

아이들은 여전히 김밥을 먹고 있다. 싸우던 신랑 자기 몫의 김밥 두 줄은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란다. 성질이 나서 먹을 수가 없단다. 나, 그 말에 또 눈물 난다. 또 운다.

울다 생각하니 배 고프다.

"안 먹으려면 먹지 마라. 나나 먹어야지. 아, 배고파."

울고났어도 시장하던 터라 김밥은 맛있다. 두 줄 먹고 잔다.

잠결에 들으니 부스럭부스럭 봉지 만지는 소리가 나고 음식 씹는 소리가 난다.

"안 먹는다더니 왜 먹어?"

"아침도 안 먹었다."

오늘 건강검진한다고 공복으로 오라고 해서 빈속으로 출근했다. 그 전쟁을 치르고 시골집에 도착했다.

 

절여진 배추를 돼지 막 앞에서 막 씻고 있던 참이다. 얼른 옷 갈아입고 고무장갑 끼고 덤벼든다.

남편은 세발 리어카로 씻어 놓은 배추를 나른다.

어머니와 내가 초벌로 씻고, 그다음 형님이 씻고, 마지막으로 동서가 씻고, 네 번 씻는다.

씻다가 문득 아까 일이 떠올랐다.

"흉 좀 봐야지......"

하면서 아까 일을 꺼냈더니 형님과 동서는 배를 잡고 웃는다. 옆에서 남편은 웃으며 변명을 늘어놓는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그래도 아들 편이시다. 그 김밥집 아주머니가 아주 나빴단다.

성질 급한 사람만 잘못이 아니란다. 그러시겠지요. 어머니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았으니까요.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겠지요.

 

다행히 날이 푹해서 손 시리지 않고 춥지도 않다. 한참 걸려서 다 씻은 후에 저녁을 지어먹고 속을 미리 손질했다. 무채는 채칼로 아주버님이 밀고, 미나리와 파는 내가 썰고, 김치 사이에 넣을 속박이 무는 형님이 썰으셨다. 우리 신랑은 지난해에는 자기가 무채 밀었다고 오늘은 인어공주 자세로 요염하게 턱 하니 소파에 누워 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해 먹고 본격적인 비비기에 들어갔다. 커다란 고무 대야에 생새우 넣고, 무채 넣고, 미나리, 갓, 새우젓, 고춧가루, 찹쌀풀, 당원, 조미료, 생강, 마늘 넣고 그것을 섞는 데는 남편이 거들었다. 고무장갑 끼고 휘휘 휘둘렀다가 뒤집었다가 하면서 잘 섞었다. 한참 걸린다. 고루 섞이려면.

 

커다란 쟁반을 하나씩 앞에 놓고 어머니와 형님, 나는 비비고, 동서는 보조이고, 남편은 배추를 나르는 일을 맡았다. 여섯 명의 크고 작은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자전거를 타고, 개를 앞세우고 학교로 갔다가, 뒷내에 갔다가,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닌다.

 

이른 아침, 남편이 어머니 모시고 시내의 마트에 다녀오면서 아이스크림을 사 와서 아이들은 그 추운 날 하나씩 입에 물고, 추운 줄도 모르고 왔다 갔다 한다. 개도 덩달아 신나서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놀다가, 혹여 저를 줄에 묶어두고 그냥 가면 왜 그냥 가느냐고 짖어대곤 한다.

 

우리는 열심히 속을 비비고, 또 비빈다. 허리가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너무 한 자세로 오래 있다고. 다리도 신호를 보낸다. 고양이가 필요하다고. 에고고......

 

점심은 보조인 동서가 돼지고기를 삶고, 고구마도 삶아서 맥주 한 잔 곁들이며 먹고 마신다. 온 동네 헤집고 다니던 아이들과 비비기에 바빴던 세 여자와 나르기에 바뻤던 한 남자, 보조가 더 힘든 또 다른 한 여자. 모두 몰두해서 열심히 입으로 나른다. 아버님은 결혼식에 가셨다.

오랜만에 말끔하게 차려입으시고.

 

맨 처음 똑같은 200포기이지만 포기가 작아서 지난해에는 7시에 끝났지만 올해는 2시면 끝나겠다고 하던 것이 3시로 미뤄졌다가 다시 4시로 미뤄졌다. 4시에 끝나고 알타리와 파김치를 담았다.

그리고 차 밀릴 것을 염려해서 저녁은 가다가 휴게소에서 먹겠다며 쌀 한 자루와 무 한 자루, 고구마와 고춧가루, 들기름 1병, 마늘 한 접, 배추김치 큰 통으로 1통, 알타리와 파김치를 싣고 출발했다.

 

역시나, 역시나 차는 밀렸다. 명절날 방불케 도로인지 주차장인지 분간이 안 갔다. 기생충알 나온다 어쩐다 하니 모두 시골집에 가서 김장을 해오는지 어쩌는지 원.

 

그 와중에 나는 열났다. 피곤이 겹쳐서인지 으슬으슬 계속 춥다 했더니 열이 오르고 있었다. 남편 외투와 아이 코트까지 가져다 덮었는데도 여전히 추웠다.

 

12시 다 되어 집에 도착했다.

이로써 행사 하나가 지나갔다.

어쨌든 당분간은 김치 담글 염려 없으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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