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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열함

김혜자과

by 눈부신햇살* 2005. 11. 25.

 

 

사람은 살면서 어떤 말을 가장 자주 듣고 살까. 나는 아마도 "여자답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듣고 살지 싶다. 성장기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참 말이 없다"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말수도 느는 것인지 지금도 수다스럽게 말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 말없다,는 말은 거의 듣지 않는다. 그 기점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아이에게 말을 시키다보니 자연스레 말수도 늘지 않았나 싶다.

 

사실, 나는 '여자답다'라는 말을 과히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 '말이 없다'는 말이 칭찬일 줄 알았다가 어느 시기에 자연스럽게 그것이 칭찬이 아닌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어느 시기에서 '여자답다'는 말이 꼭 칭찬만은 아닌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요즘의 내 반응은 "아, 나, 그 말 참 싫어하는데......" 이렇게 솔직한 답변이 나오게 된다.

 

어느 해인가, 두 시누이네 가족과 함께 술을 마시며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는데, 시누이가 김혜자 씨 얘기를 했다. 그때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봉사를 하고 있을 때였나보다. 티브이 방송 토크쇼에 나와서 얘기하는데, 아직도 그렇게 순수하고 소녀 같고 마음이 맑다고 칭찬했다. 그러더니 그래도 어찌보면 너무 그래서 세상물정 모르는 사춘기 소녀처럼 보여서 좀 이상하게도 보인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나를 쳐다보더니 "여기도 그런 과 한 명 있잖아." 그러는 것이다. 느닷없는 말에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렸다. 생각해보니 그것은 욕쪽에 가까운 말이었던 것 같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미 생각을 굴리고 있는 사이에 반박할 타이밍을 놓쳐 버린 것이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에 새삼스럽게 그 일을 거론한다는 것은 속 좁고 나쁜 인간성만 드러내는 결과인 것 같아서 인상만 점차로 구겨지면서 말없이 넘어갔다. 큰시누이는 그 말을 하고, 작은시누이는 그 말에 반색을 하며 웃었으니 내가 갑자기 말이 없어지므로 자신들이 얼마쯤은 잘못했다는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것을 눈치챘다는 것을 나 역시 눈치채서 감정을 표나게 하면 어색한 분위기로 이어질 것 같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어울리다가 돌아왔다.

 

돌아서 오는 차 속에서 그 일이 떠올라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다.

"아니, 당신 동생은 왜 그래? 그렇게 세상물정 모르는 사춘기 소녀처럼 보여서 어쩔 땐 좀 이상하다면서 왜 나더러 김혜자 과래? 왜 그래? 날 뭘로 보고?"

남편은 웃기만 했다.

"그 일이 우스워?"

"김혜자과라는 말이 싫어?"

"그게 아니고, 칭찬하고서 김혜자과라면 누가 뭐래. 흉을 보고서 나더러 김혜자과라잖아."

"질투하나 보지. 당신이 너무 괜찮아 보여서. 저는 전원주과잖아. 전원주가 나아, 김혜자가 나아?"

(여기서 잠깐, 전원주씨 생활력 강하시고, 연기력 좋으시고, 언변도 좋으시고, 참 재주 많은 분이시다. 소탈하고 친근한 옆집 아주머니 같으시고...... 절대로, 절대로 전원주씨 흉보는 거 아니다.)

아, 그 말 한마디에 내 맘은 봄눈 녹듯이 스르르 풀려서 갑자기 살랑거리는 목소리로 그랬다.

"김혜자씨가 훨씬 여자답지이!"

"그냥 당신을 부러워한다고 생각해."

 

얼마전에 동창생의 집들이에 갔었다. 얼굴이 예쁘장하고 아이 셋의 엄마 같지 않은 날씬한 몸매를 가진 일년 후배가 왔는데, 친구가 그랬다.

"쟤 참 이쁘지?"

사실은 나도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나더러는 예쁘다고도 안하면서 그 애만 예쁘다고 하길래

"우리 나이에도 이쁜 거 따지냐?"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가시나, 이쁘면 좋잖아."

그런다. 그래 이쁘면 좋지. 누가 그걸 몰라. 왜 내게는 그 말을 안해주냐고. 질투나게스리.

돌아오는 길, 후배 하나가 태워다 주는데, 그 애와 합석을 하게 됐다.

얼마쯤 왔을까. 무슨 말끝엔가 그 애가 내게 그런다.

"언니, 언니는 참 여자다워요."

"아, 나 그 말 참 싫어라 하는데......"

"왜요? 난 참 좋아 보이는데."

"너도 여자답잖아. 이쁘고."

"나는 선머슴아 같아요. 언니가 여자답죠."

하고 여자답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어떤 점이 그렇게 여자다워 보여?"

"그냥, 다."

나는 생각에 빠져 들었다. 도대체 어떤 점이 나를 그리 여자다워 보이게 할까.

말, 행동, 내숭.

말 - 말을 여자답고 애교스럽게 한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그런데 타고난 이쁘고 여성스럽고 젊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를 난들 어쩌라구.(우와, 돌이 무더기로 날라온다.)

가끔씩 모르는 사람이 집에 전화를 하면 "엄마 바꿔라."라고 말할 때도 있다. 목소리도 나이 먹으면 굵어지고 저음이 된다는데, 나는 여전히 고음의 가는 소리가 난다. 그래서 목소리가 젊게 들리나보다. 더러 너무 하이톤이지 않을까, 염려스런 마음도 드는데, 거슬릴 정도는 아니라고 하니 안심을 한다.

행동 - 여자답게 가만가만 행동한단다. 그것은 소극적이고, 운동 신경 둔한 탓에 느리게 천천히 행동하는 탓일게다. 빠르게 행동하면 여자답지 않은가. 나는 오히려 그 점이 의문스럽다. 그러고 보니 김혜자 씨도 절대로 빠르게 행동하지는 않으실 것 같다. 그래서 김혜자과라고 하나?

내숭 - 내숭을 떨려고 해서 떠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이상하게도 내게는 수줍음이 많다. 조금만 창피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사람 많은 곳에서는 불쑥불쑥 잘 나서지도 못하고, 술 취해서 허튼 행동 할까봐 밖에 나가서 술 마실 때면 늘 긴장을 하고 술을 마신다. 그러다 보니 어쩔 땐 내숭스럽게도 보이나 보다. 그러나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성격이지 내숭은 아니란 걸 잘 안다.

 

김혜자 씨도 아직도 수줍음이 많다. 그렇게 오랫동안 연기생활을 했음에도 수줍어 하고, 가만가만 말하고, 불쑥불쑥 나서지 않고, 조용히 웃는다.(아,나는 웃음만큼은 조용히 웃지 않는다. 가만, 말도 가만가만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말을 여자답게 한다고 하지. 아, 지극히 여성스런 목소리!^^)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는 연기보다는 봉사하는 쪽에 더 관심을 두고 열심이신 것 같다.

연기할 때도 몰입하는 부분이 존경스러웠는데, 봉사를 해도 참 열심히 하신다.

그런 훌륭한 분과 같은 과라고 하니 정말로 나를 부러워하는구나 생각하고,

여자답다는 말도 그리 나쁜 말로만은 듣지 말아야 할랑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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