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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종로에서 2

by 눈부신햇살* 2005. 10. 26.

 

 

어찌어찌하다 보니 10개월 만에 모임을 했다. 10개월 만에 모임을 했다는 말은 10개월 만에 종로에 나갔다는 말과 같다. 종로는 우리들의 아지트다. 막상 말은 이렇게 하지만 길눈이 어두운 나는 그 골목이 그 골목 같고, 거기가 거기 같아서 언제나 생각 없이 친구들 뒤만 쫄쫄 따라다닌다. 수다만 떨면서.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도심 속의 한적한 곳, 종묘 안으로 들어갈려고 했더니 쉬는 날이다. 다른 고궁이라도 거닐자고 해서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114에 전화해서 번호를 안 다음 경복궁 관리사무소로 전화했더니 역시나 휴무인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우리는 전생에 무수리였거나 상궁이었는지, 아님 조금 더 출세해서 임금님 눈에 띄어 권력의 꼬투리라도 잡게 된 후궁이었는지 고궁을 내 놀던 옛 동산이나 내 거닐던 옛 궁전 뜰 쯤으로 여길만치 늘 정겨운 마음이 그득그득 차오른다. 아니 애국심이 강한 후손이어서일까. 아무튼 우리의 휴식 같은 고궁이다.

 

결국 차선책으로 11월 모임을 당겨서 하면서 종묘와 창덕궁의 단풍을 구경하자고 합의를 보고 동대문 쇼핑가로 몰려 갔다. 종로를 걷고 또 걷는다.

 

아니, 걷는 것인지 사람들에 떠밀려 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수다에 빠져서 생각없이 걷고 있는데, 문득 청계천이 보인다.

"야, 청계천이다!"

나의 감탄사에 여지없이 날아오는 타박, 지청구. 난리법석이다.

"이제 봐?"

"궁금하지도 않디?"

"야, 촌스럽게 감탄사를 지르고 그래?"

아이고, 나를 어디다 숨겨 버리고 싶다. 그저 헤벌쭉 바보처럼 웃어주는 수 밖에.

 

얼마나 그렇게 종로 거리를 걸었을까. 그저 다리를 어디다 부리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좀 앉았으면 좋겠다."

그랬더니 너도 나도 다리 아프다고 어디로 들어가잔다. 두산타워의 꼭대기층으로 올라갔다.

 

평일에 어디 가면 느끼는 거지만 여자들만 잔뜩 나와 있다.

"불쌍한 남편들."

친구가 그러길래

"야, 남편들은 밤 시간에 나오고, 여자들은 낮 시간에 나올 뿐이야. 이따가 우리는 밥 하러 들어갈 거잖아."

"그런 거야?"

하하하....... 호호호....... 깔깔깔....... 키득키득...... 와그르르......

접시가 깨져도 몇 개는 깨졌을 것이다. 아줌마의 특성.

옆자리 무시, 체면 몰수, 담장을 넘기고도 백 미터는 더 날아갈 큰 웃음소리.

 

그런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시댁 험담, 남편 험담, 자식 자랑.

왜 남편은 흉을 보고, 자식은 자랑을 할까. 늘 두 친구는 다시 태어나면 혼자 살고 싶다고 하고, 나와 다른 한 친구는 다시 태어나면 아예 고등학교 때부터 남자 친구 사귀어서 그 친구와 진하게 연애하고 일찌감치 결혼해서 아들, 딸 안 가리고 쑥쑥 잘 낳아서 알콩달콩 깨 쏟아지게 살고 싶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금 사는 남편과는 말고, 다른 남자와. 왜냐하면 이번 생에서 살아봤으니 다음 생에서는 다른 남자와도 살아봐야 될 것 아닌가. 흠흠......

 

다른 한 친구는 아직도 싱글이므로 그저 모나리자 같은 미소만 띠고 앉아 있다. 속으로 그럴까? 잘들 논다. 싱글인 친구 앞에서.

 

3시간 족히 앉아서 수다를 떨고 일어설 무렵, 무심코 얼마 전 집안에 있었던 좋은 일을 꺼내게 됐다. 이제야 얘기한다고 응큼하다나 어쩐다나. 그러면서 한턱내라고 난리 났다. 한턱 안 냈다가는 온전히 집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다.

"그래, 까짓 거 가자."

그래서 주점으로 갔다. 3000CC를 앞에다 두고 또다시 늘어지는 수다.

 

창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아이들에게 전화한다.

"자장면 시켜 먹어라."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색다른 음식 먹는다고 환호성을 지른다. 그렇지. 엄마야 늦게 들어오든 말든 맛있는 거만 있으면 족하고 행복하지.

 

알코올기가 오르니 다른 친구 하나가 노래방은 자기가 쏜다고 한다. 그러나 범생이 아줌마들.

"안돼. 너무 늦었어. 다음에 가자."

너무 늦지 않게 적당한 시간에 일어서서 둥지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서 시계 보니 9시가 채 되지 않았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오는 시간도 있는데, 아, 정말 양호한 귀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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