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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열함

세 살짜리의 아빠 흉내

by 눈부신햇살* 2005. 4. 22.

 

 

 

 

결혼한 지 3년 만에 큰아이가 세 살, 작은아이가 이제 백일을 갓 지났다. 큰아이가 아들이라 둘째
는 딸이길 원했건만 둘째 아이도 아들이다. 바라던 딸이 아니라 내심 서운함이 큰데, 주위에서 겁
주는 소리 또한 크다. 아들 둘 키우다 보면 느는 건 주름살이요, 커지는 건 목소리뿐이고, 어찌나
우악스럽게 놀아대는지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다 보면 또래들 엄마보다 쉬 늙는단다.
그럴 때면 괜히 둘씩이나 낳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커가는 아이들의 재롱 속에 그런 생각은 봄
눈 녹듯 사라지곤 한다. 특히 세 살짜리 큰아이의 아빠 흉내가 곧잘 우리를 웃기곤 한다.
하루는 집안 청소를 하다가 무심코 골목에서 아이들과 놀려고 나가는 큰아이의 행동을 보고 혼자
서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제 아빠가 출근할 때 현관에서 구둣솔 문지르는 걸 예사롭게 보지 않
았던지, 운동화를 신더니 두어 번 쓱쓱 문지르고 나가는 것이다. 그 후로도 눈여겨보니 나갈 때마
다 매번 구둣솔로 문지르곤 한다.
또 있다. 제 아빠는 키가 커서 거울을 볼 때면 엉거주춤하게 서서 두 손으로 머리를 쓰윽쓰윽 넘
기곤 하는데, 저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키가 작아서 충분히 비치고도 남는 키를 낮추고 엉거
주춤하게 서서 머리를 쓰윽쓰윽 넘기고 있지 않은가. 너무 우스워서 웃음을 터뜨렸더니 쑥스럽
다는 듯이 씩 웃는다.
그리고 제 아빠가 깔끔을 좀 떠는 편인데, 핏줄은 어쩔 수가 없는지, 아님 그것 역시 흉내내기인
지 아이 역시 그런다. 컵에 보리차 찌꺼기가 조금만 떠 있어도 마시지 않고, 목욕물에 비누거품이
나 때가 조금만 떠 있어도 기겁을 하고 나와 버린다. 번데기를 보고 질색을 하는 것 역시 부전자전이다.
제 아빠가 퇴근해 엎드려 신문을 읽고 있으면 아이도 따라 엎드려 읽는 척하고, 옆으로 누워 팔
을 괴고 TV를 보면 잘되지도 않는 자세를 열심히 따라 한다. 다리를 꼬고 누우면 그 조그만 다리
를 꼬고 눕고, 제 아빠가 운동이라도 할라치면 그것 역시 따라서 하느라 아빠를 귀찮게 한다.
요즘은 말문이 트이느라 말 배우기가 한창인데, 가끔가다 우리 부부가 무심코 쓰는 과히 듣기 좋
지 않은 말이 튀어나올 때면 가슴이 뜨끔하다. 좋은 부모 밑에 좋은 자식이 있다는데, 좋은 본보
기가 되려 큰아이의 말과 행동을 보며 반성하곤 한다.

 

 



처음으로 어느 잡지에 실리고 원고료를 손에 쥐었던 글이다.
그로부터 딱 10년이 지나서 고 녀석이 열세 살이 되었다. 깔끔을 떨던 녀석은 날마다 제 방을
돼지우리로 만들고 학교를 간다. 보드랍던 피부는 여드름 밭이 되었다.
키는 훌쩍 커서 어느새 나를 넘고 제 아빠 키를 넘보고 있다.
저에 대해 써놓은 글들을 읽는 게 재밌는지 육아일기와 이 글이 실린 잡지를 들여다보며
가끔씩 키득거린다. 다른 동화책보다 훨씬 재밌다고 하니 대단한 나르시시즘이라는

장난스러운 생각도 들지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그런 감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십 년 후면 스물셋이다. 대학생이 되어 있으려나.
대한민국의 씩씩한 군인이 되어 있으려나.
그럼 나는 꼬부랑 할멈이 되어 있는 건가. 
무심한 세월이 하릴없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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