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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호의 사계(四季)

구름 감상 3

by 눈부신햇살* 2023. 8. 10.

 

 

 

 

 

첫사랑의 강

 

                    류 시 화

 

그 여름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너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지

물속에 잠긴 발이 신비롭다고 느꼈지

검은 돌들 틈에서 흰 발가락이 움직이며

은어처럼 헤엄치는 듯했지

 

너에 대한 다른 것들은 잊어도

그것은 잊을 수 없지

이후에도 너를 사랑하게 된 순간들이 많았지만

그 첫사랑의 강

물푸레나무 옆에서

너는 나를 기다리고 있지

 

많은 여름들이 지나고 나 혼자

그 강에 갔었지

그리고 두 발을 물에 담그고

그 자리에 앉아 보았지

환영처럼 물속에 너의 두 발이 나타났지

 

물에 비친 물푸레나무 검은 그림자 사이로

그 희고 작은 발이

 

나도 모르게 그 발을 만지려고

물속에 손을 넣었지

우리를 만지는 손이 불에 데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가

기억을 꺼내다가 그 불에 데지 않는다면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때 나는 알았지 

어떤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우리가 한때 있던 그곳에 

그대로 살고 있다고

떠나온 것은 우리 자신이라고

 

 

 

 

 

니가 좋으면

 

                          김 해 자

 

가끔 찾아와 물들이는 말이 있다

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나가는 말

전생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푸른 이파리 위에

붉은 돌 찧어 뿌리고 토끼풀꽃 몇 송이 얹어

머시마가 공손히 차려준 손바닥만한 돌 밥상 앞에서 

이뻐, 맛있어, 좋아,

안 먹고도 냠냠 먹던 소꿉장난처럼

덜 자란 풀꽃 붉게 물들이던 말

덩달아 사금파리도 반작 빛나게 하던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말한 게 다인 말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

나만 얻어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붉은 돌에 오소록 새겨진

 

 

 

 

 

흰 구름 

 

               헤르만 헤세

 

오, 보라! 오늘도 흰 구름은 흐른다

잊혀진 고운 노래의

나직한 멜로디처럼

푸른 하늘 저편으로 흘러만 간다

 

기나긴 방황 끝에

온갖 슬픔과 기쁨

사무치게 맛본 자만이

흘러가는 저 구름 이해할 수 있으리

 

햇빛과 바다와 바람과 같이

가없이 투명한 것들을 난 사랑한다

그것은 고향 떠난 나그네의

자매이며 천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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