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조금 쓸쓸해지던 날 신정호에 갔다.
며칠 사이로 나뭇잎은 더욱더 떨어져 길 위에 쌓이거나 부는 바람에 뒹굴고,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쪽에선 장미와 나무수국과 남천의 월동준비로
짚으로 엮은 발 비슷한 것으로 나무 밑동을 감싸며 바쁘게 일하는 인부들.
신계행의 노래 한 소절이 떠올랐다.
아, 가을 가~~~을 오면 가지 말아라
가을 가~~~을은 내 맘 아려나~~~아
내 마음 알리 없는 가을아,
오면 가지 말아라~~아~~
오늘은 볕 좋은 창가에 앉아 또 멸치똥이나 따고 있다.
틀어 놓은 라디오 <신지혜의 영화음악>에서 마음을 적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내 몸에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은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풀어 헤친다.
그리고 이따금 바람에 살랑거리는 작은 숲의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다.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주소서.
막바지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하루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베푸시어,
영근 포도송이가 더 온전하게 무르익게 하시고,
짙은 포도주 속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해주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남아,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낙엽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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