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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방

참 빨랐지 그 양반

by 눈부신햇살* 2022. 9. 19.

고향 친구들과 하는 단톡방에 어느 날 시 한 편이 올라왔다.

시나 한 편 읽어보드라고, 이었나,

이런 시도 있드라고, 하는 멘트였나...... 덧붙여서 올라온 시 한 편.

 

맨 처음엔 어머, 시가 야하네, 하는 생각이었고,

읽고 나니 찡한 내용이었고,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이었다.

 

 
 
 
 
 
 
 
 
참 빨랐지 그 양반
 
                                 이 정 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 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 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이정록(1964~)

충남 홍성 태생

시인, 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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