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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열함

먼길

by 눈부신햇살* 2021. 3. 2.

 

 

 

지난 2월 22일 89세를 일기로 아버님께서 먼길을 떠나셨다.

세 번의 위독한 고비를 넘기고 더 이상의 연명치료는 하지 말자는 결정으로

투석을 멈추고 인공호흡기를 떼었다.

병원에 입원하신 지 20여 일 동안에 마른 몸은 더욱더 바싹 마르고 인공호흡기를 달고도 호흡은 가빠

뵐 때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곤 했다.

 

29년 전 어머니 친척들과의 시댁 마을 저수지 소풍 길에

모든 것이 어렵기만 했던 갓 시집 온 새색시인 내 손을 꼭 잡고 걸어가시며

나는 자부나 딸이나 똑같은 마음이다, 라며 말씀하시던 아버님.

오히려 당신의 딸보다도 내게 마음을 더 기울여서 시시때때로 작은 딸의 원성을 들었던 아버님.

심지어 위독한 병실에서조차

" 아버지,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셋째 며느리 왔어."

라고 말해 헛웃음을 짓게 만들던 작은 시누이.

 

마냥 사람 좋던, 그래서 어머님을 독하고 강인한 사람이 되게끔 하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평을 듣던 아버님이 머나먼 길을 떠나셨다.

 

모두들 고운 치매라고 했던 치매를 몇 년 앓으셨고,

청력이 조금 손상되었고(그래서 때론 보드판에 글씨를 적어 소통했다),

워낙 소식하신 데다 소화능력이 떨어져 영양분 흡수가 원활하지 않아

많이 여위어서 기력이 조금 없으시긴 했지만

건강하게 잘 다니시다가 얼마 앓지 않고 돌아가셨으니 이만하면 호상이라고 모두들 위안을 삼았다.

 

 

 

 

 

 

 

 

 

 

딸기농사 지으실 때,

수확철 바쁜 일손 거들러 와 한 달 동안 머물던 며느리가 집으로 돌아가던 날,

허겁지겁 논에서 달려와 며느리 손 꼭 붙들고 눈물짓던 아버님을 뵙던 것은

저 둥구나무 밑에서였다.

"내가 말여, 잉, 니가 간다고 허니께 말여, 잉, 내 마음이 으치께나 허전하고 서운한지 말여, 잉......"

한창 귀엽던 두 살배기 손자와 함께 밥해주며 한달씩이나 생활하던 며느리가 떠나는 것이

정 많고 마음 약한 아버님에겐 큰 허전함으로 다가오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제는 아버님의 아지트 비슷했던 저 둥구나무를 보면 

자식들이 아버님을 떠올리곤 하겠지.

여름날 저 나무 밑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곤 하시던 아버님.

 

 

 

 

 

아버님, 잘 가세요.

그곳에서 부디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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