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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열함

취중진담

by 눈부신햇살* 2019. 10. 20.

 

 

 

김동률의 '취중진담'이란 노래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아침이면 까마득히 생각이 안나...'

나는 까마득히 생각이 안날 정도로 취하는 경우는 55년을 사는 동안 두세 번이나 있을까 말까해서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가사이지만

남편에게는 빈번한 일인가보다. 아니 쑥스러워서 짐짓 기억이 안나는 척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말로 그렇게 까마득히 기억이 안나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면 멋적을까봐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곤 한다.

 

신혼 때부터 남편은 술에 취하면 내 이름을 부르며 사랑한다고 정말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한다고 수없이 되뇌였다.

처음엔 감동도 받았으나 이내 술버릇이란 걸 간파한 후론 알았으니 얼른 자라고 다독이곤 했다.

처음에 한두 번이야 나를 정말 그렇게 사랑해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몇 번 반복하고 나면 이내 시들해지며 귀찮다는 생각도 슬그머니 올라오는 터라

또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마저 없잖아 들었다.

 

어느 해이던가. 명절에 시댁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들만 모인 자리에서 그 얘기를 꺼내며 남편 흉을 보았었다.

남편은 희한한 주사가 있다고.

큰형님은 나더러 이상한 방식으로 남편 자랑을 한다고 했고,

어머니는 고마운 줄 알라 하셔서 괜한 얘기를 꺼냈다 싶었다.

 

그러다 주말부부를 하게 됐고 주말에 올라온 남편이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하는 경우는 없는지라

그 주사는 없어지는 줄 알았지만 왠걸 전화로 듣게 됐다.

언제나 술이 거하게 취하면 남편이 하는 말은 한결같다.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그 뻔한 말이 가끔은 귀찮아서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줄 너무너무 잘 알고 있다고도 답했다가

가끔은 그 뻔한 거짓말 진짜냐고 되묻기도 했다가

나에게 뭐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냐고 묻기도 하다가

부족한 나를 그렇게 사랑해줘서 고맙다고도 하다가

어쩌다 한번쯤은 나도 당신을 참 많이 사랑한다고 답하기도 한다.

 

정말이냐는 되물음에는 정색을 하며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힘줘 강조하고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호탕하게 껄껄껄 한참을 웃는다.

 

그 뻔한 사랑한다는 말이,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말이기도 하다는 걸 오래전에도 지금도 항상 느낀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편에게 인정 받고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나를 얼마나 북돋으며 따뜻한 기운을 심어주는지...

 

그러나 함정은 항상 취중에만 그런 말을 한다는 것.

맨정신에는 그렇게 애틋하고 간절하게 내게 사랑한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어쩌다 농담처럼 스쳐가는 장난처럼 사랑한다고 툭 던지기는 하지만...

더 큰 함정은 지난 밤에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모른다는 것.

 

 

 

 

 

 

 

지난해 생일 무렵에 갔던 파주 마장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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