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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11월의 여섯째 날

by 눈부신햇살* 2007. 11. 6.

 

1.

요 며칠 피아노 앞에 앉아서 아들 녀석이 뚱땅거린다. 집에 있을 때면 습관처럼 라디오를 켜고 있는 엄마에 대한 배려인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친다. 주방에서 저녁 찬거리 따위를 매만지다가 녀석의 기척이 잠잠해서 방을 들여다보면 피아노 앞에 앉아 삑삑거리고 있다. 이어폰을 꽂고 치기 때문에 피아 노음 대신 건반을 누르는 소리만 삑삑 들린다. 대부분 모르는 척 넘어가다가 아는 척하고 싶어질 때만 묻는다.

"뭐 치는데?"

그럼 이어폰을 빼고 들려준다.

'하얀 연인들' '스팅' '사랑의 기쁨' '닥터 지바고' '문 리버' '아드리나를 위한 발라드'......

'스팅'은 제법 들을 만한데 '아드리나를 위한 발라드'는 한번에 매끄럽게 치지 못한다. 그래도 연주를 직접 듣는 맛이 있어서 그런대로 들을만할 때도 있다.

'하얀 연인들'을 듣고 있으면 <겨울 연가>에서 최지우와 배용준의 눈밭에서의 풍경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매서운 겨울 바람에 휘날리던 외투 자락, 베이지색 코트와 머플러 차림의 배용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바라보던 최지우의 눈빛, 남이섬에서의 자전거 타고 달리던 모습, 천진스러운 눈 장난, 사랑이 시작될 무렵의 첫 입맞춤 등등......

'닥터 지바고'를 들으면 가슴 한구석이 찡해진다. 눈속으로 멀어져 가는 라라의 썰매를 창문으로 바라보고 서있던 지바고의 슬픈 눈이 떠올라서.

'사랑의 기쁨'을 듣고 있으면 언젠가부터 <봄날은 간다>에서의 이영애와 유지태가 떠오르게 돼버렸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고 묻던 유지태의 절망스런 표정. '사랑의 기쁨'이 배경 음악으로 깔리며 비치던 두 연인들의 모습......

그러다가 다시 기타를 들고 치기도 하는데 기타로는 주로 최신 팝송을 치기 때문에 내 귀에는 피아노 칠 때가 더 반갑다.

 

2.

다른 해와 똑같이 아침 일찍 엄마로부터 가장 먼저 축하 전화가 왔다. 고마워요,하고 잘 받았다.

두 번째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애가 웬일일까? 요 몇 년은 그냥 지나치더니 무슨 맘이 들었을까? 하며 전화를 받는데, 그럼 그렇지, 만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번 달 모임은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물어왔다.

"야, 오늘이 내 생일이다. 웬일인가 했더니 모임한 지 얼마나 됐다고 모임만 묻냐?"

하고 단박에 퉁명스럽게 타박을 날렸더니

"아, 미안. 달력에 적어 놓고 이런다......"

어쩌고 저쩌고, 구시렁구시렁...... 정작 나도 남 생일 챙기는 게 가뭄에 콩 나듯이 하면서......

세 번째로 절대로 그냥 지나칠리 없는 둘째형님이 올해는 문자 대신 전화를 걸어왔다.

형님은 수다를 즐기는 형이니 짧게 '용건만 간단히' 끊으면 형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그러니까 시부모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두 시누이와 아주버님들과 시동생과 큰 형님과 동서와 조카들에게까지 두루두루 걸쳐 이야기를 나눴다. 도마 위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요리를 해댔으니 오늘 손 씨 집안사람들 귀 좀 가려웠을 터이다. 신선놀음 같은 수다에 빠져 30분이 후딱 지나가고 한 시간을 향하여 초침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한 후에야 "김장 때 뵈어요." 하고 마무리를 했다.

 

3.

바야흐로 11월이다.

내가 가장 싫다고 외쳐대던 11월이다.

이유를 물으면 삭막해서 온통 잿빛투성이여서 싫다고 했다.

꽃들은 시들어 버리고, 나무도 옷을 벗어 버리고, 바람만 휑휑 쓸쓸하게 불어대면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아서 싫었다.

그러다 지난해 가을, 신문에 난 한 토막의 글을 보고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 첼로의 저음 같은 11월은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달이다.

  화려한 단풍도 옷을 벗고 낙엽이 쌓이기 시작하는 달.

  나뭇잎도 땅 빛깔과 닮아 가고

  이불처럼 대지를 덮고 근원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 잎을 떨군 겨울나무는 본질만 남아 있는 것 같다.

  겨울나무엔 실존의 깊이가 있다."

                                        - '능으로 가는 길' 강석경의 산문집에서

 

카피라이터인 최인아 씨가 인용한 구절이다. 글쓴이는 11월을 이렇게 평했다.

 

" 누구는 이파리 무성한 여름날의 나무가 인생으로 치면 청년처럼 보기 좋다고 칭찬한다.

  하지만 그 많은 이파리가 내 눈엔 번뇌로 보인다.

  그러므로 '잎 떨군' 11월의 빈 가지 나무야말로

  내겐 번뇌를 지나 생의 정수에 가 닿은 수도자처럼 본질 그 자체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11월이 좋고 11월은 나의 달이다."

 

세상에 태어난 지 만으로 마흔세 해가 되는 오늘.

인생을 계절로 치면 초가을쯤 되려나. 이제 막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려는 호시절이려나.

11월, 늦가을이 쓸쓸하고 삭막해서 싫다고 했지만 어떤 이는 그 많은 무성한 번뇌를 떨군 홀가분한

계절이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니 인생의 늦가을도 많은 일들에서 손을 놓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서는

여유로운 시기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로 가기 위해서 치뤄야 하는 떨굼의 시기를 거치고 있는지 요즘 들어 유달리 축 처지고 있는

남편의 어깨가 가엾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기도 하는 파란 하늘은 아름답기만 한 가을날이다.

 

*****

남편이 맛있는 것을 사주마 했다. 좀 일찍 퇴근해서 집 근처에다 주차를 해놓고 걸어서 20여분이 걸리는 백화점 앞의

캘리포니아 스시 롤 집에 가자고 했다. 처음에는 그저 사준다는 말에 혹해서, 또 마침 생선초밥이 먹고 싶기도 하던 터라

기쁘게 그러자며 따라나섰는데 시장기를 안고 먼 길을 걸어가려니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다.

생일에 밥 한 끼 먹자고 이 먼 길을 걸어가나 싶은 게.

게다가 가는 중에 남편의 주특기인 은근슬쩍 약 올리며 염장지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다만 상대가 내가 아닌

큰녀석이었는데 원래 큰녀석은 제 아빠가 뭐라 하면 웬만하면 입을 꾹 다무는 아이인지라 처음에는 아니라고 부정하다가

나중에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렇잖아도 먼 길 걸어가느라 살살 부아가 올라오고 있는 판에 아이를 몰아세우는 것이 못 마땅해서

내가 마구 따지고 들었더니 큰녀석이 큰 키로 뒤에서 내려다보며 "싸우지 마세요." "싸우지 마세요." 염불 외듯이 몇 번을 말한다.

그래도 일단 시동이 걸리면 할 말은 다하고 보는 나인지라 내 할 말은 끝까지 다 했다. 그러자 남편께서 몹시 섭섭하다는 듯이 한 말씀하셨다.

"어라, 짜고 덤비네!"

그 말에 모두 웃고 말았다.

지하 상가를 지나쳐 가면서 아들 녀석 둘이 돈 모아 귀걸이를 선물해준다길래 고르고 있었더니 큰녀석이 옆에서 만지는 것을 유심히 보다가 한마디 했다.

"엄마, 그건 비싼데요."

그제서야 가격이 밑에 쓰여있다는 것을 알고 아이들 형편에 맞춰 하나 고르고 모자라는 돈은 내가 냈다. 이거, 선물 맞아?

아무튼 그래도 나는 너무너무 신이 나서

"야, 아들들 크니까 좋다! 귀걸이 선물도 다 받고..."

하면서 들썩거리며 걸어갔다. 이래서 가끔 아들들로부터 울 엄마는 초딩이라는 타박을 듣는다.

 

음식점은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것이 아주 좋았다. 음식도 정갈하고 맛있어서 한결 기분이 상승되었다. 아들들이 해 준 귀걸이를 해보려다가 잘 들어가지 않아서 다시 내려놨더니 선물은 그 자리에서 해보는 것이 예의라며 큰녀석이 섭섭해했다. 거울이 없어서 귀걸이 꽂기가 힘들다고 하자 제가 꽂아준단다. 아이고, 자상하기도 한 울 큰녀석, 내 귀에 귀걸이 두 개를 달랑달랑 꽂아준다. 그러곤 흡족한 눈으로 엄마를 쳐다본다. 에고, 울 큰녀석은 이다음에 틀림없이 아내 사랑 듬뿍 받을겨!!!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후식으로 모카 커피와 아이들은 핫 초코를 마시고 계산은 내가 했다. 계산서를 내가 집어 들자 남편이 물었다.

"당신이 계산 할려고?"

"당신 요즘 돈 없다며?"

"남편 돈이 내 돈이고, 내 돈이 남편 돈인데, 생일이라고 맛난 음식 배불리 먹었으면 됐지, 뭐."

하며 돈을 내고 연말에 소득 공제받게 현금 영수증이나 끊어 주세요, 했다.

가는 길은 멀기만 하던데 배가 부르니까 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웃긴 것은 나의 단짝 친구다. 얼마 전 전화가 와서 그동안 시부 생신과 겹쳐 자꾸 내 생일을 놓쳤다며 이번엔 확실히 챙겨 주겠단다. 남원 사는 시누이네가 직접 친 꿀과 심심풀이로 언니 동생과 캐러 다녔던 고구마를 보내 주겠다고 했다. 생일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만도 황송시러운데 선물까지? 물건 오는 데에 맘도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물질 공세에 약한 나는 입이 함지박만 해져서 고맙다고 했다.

어제 늦게 동서가 마지막으로 축하 전화를 하고 어, 얘가 그새 또 잊어버렸나 보다, 하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일찍 집 전화도 아닌 휴대전화로 전화를 했길래 뭔 일이지, 하면서 받았더니 첫마디가

"ㅇㅇ야, 생일 축하해!"

이다. 푸하하 웃음이 터진 나,

"야, 어제가 내 생일이야. 그렇잖아도 이상하다 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친구는 하루 놓친 것이 억울하기도 하고, 수상쩍기도 하는지 자꾸만 이상해 하다가 오늘은 일찌감치 단감 따러 간다면서 오늘로 애써서 택배 맞춰 보냈으니 이따가 꼭 받아 보란다.

방금 도착한 상자를 풀어보던 나는 또 푸하하 한바탕 웃었다.

아기 머리통만 한 모과가 자줏빛 고구마와 신문지로 꼭꼭 여민 꿀단지 위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모과차 끓여 먹으라고 보냈나 본데 그렇게 큰 모과는 또 어디서 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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