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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헛바람 빼기

by 눈부신햇살* 2007. 9. 18.

 

아들의 마음에 든 바람에 풀무질이라도 하듯이 얼마 전 모 기획사 매니저가 아들에게 명함을 한 장 주고 갔다. 하굣길에 우르르 나오는 아이들 중에서 녀석에게만 한 장 건네주고 갔으니 아들의 마음이 얼마나 부풀어 올랐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들뜬 목소리로 집에 와서 내게 명함을 건네주며 엄마 휴대전화번호를 알려줬으니 조만간 전화가 올 거라고 했다. 그러곤 녀석은 컴퓨터 앞에 들러붙어 앉아 기획사를 검색했다. 그런 아들을 보며 염장 지르듯이 한마디 툭 던졌다.

"니가 학교 밴드 한답시고 기타를 둘러메고 다니니까 니가 헛바람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네게만 준 거 아냐?"

녀석이 버럭 화를 내며 대꾸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 순한 말씨로 가만히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내가 금방 달려들 거라고 생각하고......"

나와 똑같은 생각의 말을 하는 녀석을 보고 저게 아주 생각이 없는 녀석은 아니구나, 싶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그 기획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것저것 알아보던 녀석이 사기꾼은 아닌데 그렇게 좋은 데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 복잡 미묘해져서 아들의 말을 건성건성 들었다. 그렇잖아도 가뜩이나 학교 밴드니 교회 밴드니 바쁜 일정으로 공부에 소홀히 하는 녀석인데 공부하고는 더 소원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뱅뱅 돌았다.

 

전화한다던 기획사 매니저의 전화는 하루 이틀,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 그렇게 이 학생 저 학생에게 뿌리고 다니다 연락해오면 옳다구나,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지난번 아버님 생신 때 시골에서 저수지가의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가면서 차 안에서 우스개 소리 삼아 그 얘기를 하기도 했었다.

"...... 명함을 한 장 건네주면 제가 미끼 물듯이 덥석 물 줄 알았나 봐요. 저도 전화 안 하고 그쪽에서도 안 하더라고요."

특히 큰아주버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큰아주버님이 큰녀석의 음악 쪽으로의 진로에 대해 가장 많이 염려를 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에게도 아이에게도 그 길이 얼마나 멀고 고단하고 힘들고 돈벌이가 안 되는 일인지 누누이 말씀하셨다.

아주버님의 고등학교 시절 고적대 친구의 지금 밴드 생활과도 비교해서 말씀하셨고, 또 아주버님이 취미로 배우는 색소폰만 해도 개인레슨비가 얼마나 비싼지, 혹여 아들이 하고 싶어 하는 기타를 전공하려면 그것 또한 돈이 얼마나 많이 들며 성공하는 길이 흔한 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극구 만류하셨다. 공부만이 가장 쉽게 돈을 버는 길이고, 성공하는 길이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그 길이 가장 넓은 길이라고.

아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다보았을 때 그 말이 모두 귓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귓등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분이 어때? 하고 묻는 나에게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하면 되지. 노력하는데 안 되는 것 있어요?" 하고 되물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서 "그렇지......"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 이야기도 아주버님께 했다.

아주버님의 생각이 바뀌셨던가 보다. 아이를 붙들고 기타 레슨은 얼마 정도 받았느냐, 한 사람에게만 꾸준히 받아라, 자꾸 선생을 바꾸면 죽도 밥도 아니다, 기초만 계속 배우게 된다(아주버님이 그런 케이스로 색소폰 연주 실력이 작년이나 올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등등 조언을 해주셨다고 한다. 녀석은 기타 레슨이라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동안 담임선생님이 연결시켜준 기타 칠 줄 아는 선생님께 무료로 약 한 달 배우고, 중학교 2학년인 올해 교회에서 전도사님께 약 한 달 배우고 교회 밴드에 섰는데 무엇이 못 마땅했는지 아예 교회를 옮겨 버렸다. 옮긴 교회에서 친구들과 밴드 활동을 하고 있고, 학교에서 밴드 활동을 하는 것과 이번 여름 방학 동안 기타 학원 한 달 다닌 것이 다인데.....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그 기획사에서 지난 금요일에 전화가 왔다. 녀석의 이미지가 학생의 이미지에 잘 들어 맞고 키도 훌쩍 큰 것이 좋아 보인다고 와서 카메라 테스트나 한 번 받아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카메라 테스트라는 말이 참 솔깃했다. 어른인 나도 솔깃한데 어린 녀석의 귀에는 더 솔깃했으리라. 니 꿈이 연예인이니까 이참에 카메라 테스트 한번 받아볼래? 하고 물었다. 녀석이 반색을 했다.

사실, 은근슬쩍 꿈에 부풀기도 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길거리 캐스팅인가. 그래도 우리 아들이 내 눈에만 잘나 보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 눈에도 잘나 보이는가. 일찌감치 연예인 생활을 한다면 긴 인생길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윤도현이도 중학생 시절 때 벌써 원대한 꿈을 갖고 파주에서 여의도까지 오디션을 보러 왔다지 않는가. 별 소득 없이 돌아갔다지만. 일단 부딪쳐 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좀 더 실력을 쌓은 뒤에 정식으로 공개 오디션에 응모해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붕붕 벌떼처럼 휘젓고 다녔다. 녀석의 얼굴을 보니 내 머릿속만큼이나 복잡 미묘한 표정이었다.

 

주 5일제 근무라 남편과 함께 있는 지난 토요일에 다시 매니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오시겠느냐고. 그러마 했다. 약속 시간을 정해 놓고 그 기획사의 위치를 확인하느라 인터넷으로 그 기획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인터넷이 너무 발달한 것이 문제였다. 참 많은 정보가 올라와 있었다.

매니저로부터 명함을 받은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사기꾼인가 의심스러워 물어보는 질문도 많았고, 거기에 대한 답변도 올라와 있었다.

일단 사기업체는 아니었다. 그 기획사 출신으로 단역으로 드라마에 나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학원형 기획사였다. 그러니까 카메라 테스트를 받으면 일단 계약료로 230만 원인가를 내고 연기 수업을 받는가 보았다. 그러고도 90%가 떨어져 나가고 드라마에 데뷔한다고 해도 단역으로 몇 번 출연하고 만다는 식의 글들이 도배를 하고 있었다.

남편과 나, 우리는 생각했다. 우리 아들은 연기를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아들이 한다는 것은 기타리스트인데..... 밴드에 서겠다는 것인데...... 아서라, 말자. 지금은 한창 공부할 시기이고 정말로 기타가 하고 싶으면 다른 공개 오디션들도 많다고 하니까 거기에 응모하면 되겠지. 이러면서 풍선 같이 잔뜩 헛바람 든 가슴의 바람을 뺐다. 정말로 슈 우우 욱,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 사진의 꽃은 '부겐베리아'이고요, 돔바 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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