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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폭염

by 눈부신햇살* 2007. 8. 20.

 

연일 덥다. 슈퍼에 가려고 밖을 내다보니 쨍쨍 내리쬐는 햇볕이 무섭기조차 하다.

컴퓨터 앞에서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는 작은 아들에게 푸념을 늘어놓는다.

"야, 햇빛 봐라. 무섭다. 그야말로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다."

가? 말아? 망설이다 양산을 펼쳐 들고 시장바구니를 챙기고 지갑을 찾아들고 집을 나섰다.

학교 담장 밑으로는 키 큰 은행나무와 벌레가 알뜰하게 잎을 먹어 치운 벚나무와 가죽나무 수 그루이었는지 아닌지

조금 헷갈리면서도 가죽나무라고 단정 짓는 나무와 메타세쿼이아 몇 그루 덕분에 그늘이 진다.

양산을 접는다. 그늘에 서면 그래도 바람이 조금 시원한 것도 같다.

옆 학교의 정문까지 이어지는 벚나무 터널을 지나고 종합병원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 안경원을 지나

분식집을 지나 정육점을 지나려는데 아저씨가 유리문 뒤에 서 있다. 마주치고 싶지 않다.

한동안은 고기 맛이 좋아 단골이었지만 손님이 뜸해서인지 가게에 들어서면 가게에 딸린 방에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고기를 썰러 나오는 것이 몇 번 반복되자 그 점이 싫은 나는 정육점을 옮겼다.

눈길을 다른 곳에다 둔 채 지나치려는데 시장바구니에 접어 넣었던 양산이 다리에 걸리며 걸음이 꼬인다.

"아이코!"

하필이면 딱 그 앞에서 발이 꼬일 게 뭐람. 조금 민망한 기분이 되어 슈퍼로 간다.

 

요 며칠간 팥빙수와 맥주에 빠져 산다. 모공이 넓어서인지 유난히 얼굴에 땀이 많이 흐른다. 외출했다 들어와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면 참을 수 없는 마음이 쑥 올라온다. 그럴 때 샤워하고 먹는 팥빙수나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기분을 바꿔주기도 한다.

오늘도 장바구니에는 어김없이 팥빙수가 들어갔다.

 

더워서 어디 가는 것이 무섭지만 그래도 가만히 집에 있는 것도 좀이 쑤신다.

어제, 큰녀석은 교회에서 밴드 한다고 하루 종일 코빼기도 뵈지 않고, 작은녀석은 교회에서 곧장 친구 집으로 간다고 문자가 왔다.

집에 들어서는데 모처럼 남편이 아침 먹은 것을 설거지하고 있다. 아침 식사 설거지는 교회 다녀와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 밖의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작은 기쁨이 생긴다. 좋아서 호호 거리며 남편에게 아양을 떤다.

요즘엔 이렇게 둘이서만 집에 있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점심은 간단하게 남은 제육볶음과 상추와 김치, 감자볶음을 넣고

고추장과 참기름에 비벼서 둘이서 한 그릇에 숟가락 꽂고 먹었다. 시원한 냉커피로 입가심을 하면서 뭘 할까? 묻는다.

- 서점에 갈까?

- 에이, 가며 오며 너무 덥잖아. 그리고 뭐, 살 책 있어?

나는 얼마 전에 대여점에서 공지영과 일본 작가가 <냉정과 열정 사이>를 모방한 것 같은 느낌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을 빌려다 읽었고,

마트에 한 달치 장 보러 갔다가 서적 코너에서 신경숙의 <리진>이 눈에 띄어 두 권 사다가 읽었고, 요즘은 작은녀석이 산 <톨스토이 단편선>을 읽고 있으며 그것 다 읽으면 큰녀석 것 <위대한 개츠비>를 볼 요량이어서 서점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 아니...... 뭐 할까? 또 뒷산에 갈까?

- 그러자. 땀 한번 쫙 빼자.

지지난주 일요일에도, 지난주 일요일에도, 주중의 광복절에도 뒷산에 올랐다. 일주로를 한 바퀴 돌아 약수터에 들러오면

땀으로 멱을 감았다. 약 2 시간 가량이 소요되는데 그러고 집에 와서 씻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개운한 게 상쾌한 기분이 든다.

남편은 벌써 몇 개월째 바쁘다고 운동을 쉬고 있지만 여전히 가뿐한 몸가짐이고, 나만 여전히 헐떡헐떡 가쁜 숨을 몰아쉰다.

- 그렇게 숨이 차? 당신은 뒷산이 딱이다. 그래 가지고 800 미터나 1000 미터 되는 산에 올라나 가겠어?

그 말에 은근히 화가 난다.

- 뭘. 쉬엄쉬엄 올라가면 되지. 당신 속도에 맞추느라고 더 숨찬 거잖아. 내가 못 올라갈 것 같아?!

쓸데없이 티격태격한다.

모기에게 밥이 되었다가 돌아오는 길. 나보다 한참이나 큰 남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가 엉덩이를 한 번씩 때렸다가 한다.

- 재밌어?

- 응. 공치는 것 같아.

손으로 공을 땅바닥에 치는 것 같은 탄력감이 느껴져서 서너 대 때려본다. 그러다 이내 팔을 남편의 어깨에 두르고 기대서

내려온다.

- 나는 누군가에게 팔짱도 잘 끼지 않고, 손도 내 쪽에서 먼저 잘 잡지 않는 편인데 당신한테는 잘 그러는 편이야? 젤 만만한가 봐. 그렇지?

넙죽넙죽 대답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남편이 시큰둥하게 응, 하고 짧게 대답한다.

- 치이... 예전에는 불편하다고 해도 꼭 꽉 숨 막히게 팔 두르고 다니더니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치이...

남편은 요즘 회사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내일의 업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인데, 속없는 마누라는 옆에서 계속 애먼 말이나 해대고

어린애처럼 장난질이나 해댄다. 그렇다고 해서 내 머릿속에는 걱정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너무 덥다. 이주 내내 더울 것이라고 예보한다.

그래도 지가 길어봤자 며칠이겠지. 여름의 막바지인데.

가을의 옷자락이 슬몃 보이나 잘 찾아봐야겠다. 못 찾으면 가불이라도 해다가 억지로라도 가을바람이야 하고 우기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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