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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

by 눈부신햇살* 2007. 6. 24.

 

밀밭이란다. 보리밭에 대한 기억은 많지만 밀밭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언젠가 이렇게 말했더니 보리밭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묘한 뉘앙스를 띤 질문을 하던데

그 사람이 넘겨짚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유년시절에 관한 기억이니 숨바꼭질할 때 밭고랑에 누워 숨었을 뿐이다.

개미란 놈이 목덜미를 따끔하게 물어서 아얏! 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일어서서 들키기도 했지만.

보리밭에서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보리밭에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갈대밭이라면 또 몰라도,였다.

강화도 초지진에는 갈대밭이 없다고 어느 블로거가 답해 주시던데, 내 기억 속에는 왜 강화도 초지진의 갈대밭으로

입력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남편과 강화도를 드라이브하다가 초지진 근처를 지나가면서

그 얘기를 했더니 남편 역시 초지진에 갈대밭이 있느냐고 물어서 잠시 멍했다. 그럼 그곳이 어디라지?

생일 선물로 하루를 애인이던 남편과 같이 강화도를 돌아다녔고 이동하던 버스에서 그때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김지애 씨의 <몰래한 사랑>이란 노래가 흘러나올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저릿하기도 했다. 몰래하는 사랑도 아니었건만

왜 가슴이 저릿저릿거렸는지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해 불가능이다.

 

그대여 이렇게 바람이 서글피 부는 날에는

그대여 이렇게 무화과가 익어가는 날에도

너랑 나랑 둘이서 무화과 그늘에 숨어 앉아

지난날을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싶구나

 

내 생일이 찬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서 가슬가슬하게 몸을 감싸고 적당히 기분 좋게 옷자락을 날리는 철이라 감상에 빠져들기 쉬워서였는지, 노랫말에 나오는 무화과라는 말이 유년을 보낸 시골집의 아랫집에 자라던 무화과나무를 떠올리게 만들었는지

이 노래만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지며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아슴아슴한 마음이 올라왔다.

초지진에서 바다를 보고, 전등사에도 들러서 절을 구경하고 절 앞에 있던 작은 사격장에서 총을 쏘는 남편을 바라보며 응원하기도 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오징어보다는 달착지근한 맛이 나고 덜 질긴 쥐포를 좋아하는 나는 쥐포를 먹었다. 간간이 조그맣게 한 입 크기로 찢어서 남편에게 건네주며.

하루를 보내고 뉘엿뉘엿 해가 기울 때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에서 내 이름 석 자로 삼행시를 지어 건네주던 지금의 남편에게 감동받았던 것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 아, 낭만적이다! 그런 생각을 했던가.

지금은 그것이 바가지를 긁을 때 좋은 빌미로 작용하게 되었지만.

왜 그렇게 사기를 쳤어? 엉?

하나도 자상하지 않고,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으면서 말이야.

사랑은 둘이서 마주 보는 것이 아니고 같이 한 곳을 쳐다보는 것이다, 라는 말은 왜 또 인용했어?

내가 제일 좋아하던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을 말하길래 아, 이 사람은 퍽 감성이 발달한 사람인가 보다. 정말 로맨티시스트인가 보다, 했잖아.

한 곳에 빠지면 다른 곳은 잘 쳐다보지 않는 나는 오로지 남편만 쳐다보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예민한 촉수가 되어 감지되었다.

친척의 행사 자리에 가도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남편만 또렷이 내 눈에 들어오곤 했다. 남편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 가도 남편만큼 멋있어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시골집에 가도 남편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만 관심이 갔던 것 같다.

그러나 아이 둘 낳고 남편의 머리카락 수도 점점 줄어들고 항상 비누 냄새만 퐁퐁 풍길 것 같던 남편에게서

예전 중년 남자에게서나 느끼던 묘한 냄새가 난다고 느껴지는 날도 생기게 되었다. 사실, 남편은 어느덧 중년의 남자가 되었으니 그리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몸은 사십 대 언저리에 있어도 마음은 삼십 대 언저리에 머물고 있어서 마음이 늘 몸을 미처 따라가 주지 않아서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리라. 남편이 그리 나이를 먹는 동안 나만 이십 대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닌데, 남편도 아이고, 우리 마누라 아줌마 다 되었네, 하고 느끼는 순간도 많을 텐데.

며칠 전이 결혼 15주년이었다. 여자들은 결혼이나 생일이면 뭔가 대단히 깜짝 놀랄만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만 언제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다른 해와 다르게 남편이 알까 모를까 시험하느라고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지 않았다. 하루 전 날 넌지시 물어봤다.

"내일이 며칠이지?"

"19일."

"뭔 날이야?"

"뭔 날이긴. 화요일이네."

"그것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나?"

"뭐? 뭔데?"

그렇게 대답하다가 뭔가 이상했던지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더니

"아하하하...... 결혼기념일이구나?"

하고 그제야 알아챘다. 그럴 줄 알았다. 여자들만 시시콜콜한 것을 기억하는 뇌구조를 타고났다잖아. 그런 뇌를 타고난 내가 이해하지, 뭐.

그래도 뭔가 섭섭하다고 그 밤에 둘이서 생맥주 마시러 나갔다. 시시껄렁하게 친구들 얘기와 회사 얘기만 잔뜩 늘어놨다.

술 마신 계산도 내가 했다. 다음 날 퇴근할 때 벨렐레레레~ 전화벨이 울려서 바쁘게 저녁식사 준비하다 받으니 외식하자고 한다.

맛있는 거 만들려고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며 나갔다. 영어학원 가 있는 녀석에게 문자 넣어서 빨리 오라고 했다.

아이들 먹성에 놀라서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야, 잘 먹는다. 그러면서 또 직장 동료에 관해 얘기했다.

그 회사 여직원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성격이며 오늘은 어떤 실수를 했으며, 남편은 누구와 자주 술자리를 하며, 남자 직원은 어떠한지, 누가 남편을 열받게 하는지 나는 너무도 잘 안다. 건성으로 들으면 금방 삐쳐서 또 얘기 안 한다. 나 역시 내가 얘기할 때 건성으로 듣는 듯하면 가만있지 않는다. 부창부수인가.

남편과 나는 배를 두들기며 포만감에 젖어서 나오고 아이들 둘은 아직도 뭔가 모자란 듯이 석연찮은 느낌으로 음식점을 나섰다. 언젠가 먹을 만큼 먹어봐라, 했다가 후회하고 다시는 그러하지 않다. 다음 날 아침 배탈이 나서 화장실을 들락거리길래.

그렇게 결혼 15주년의 날이 지나갔다. 귀고리를 해줄까, 어쩔까 하던데 장신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딱히 받고 싶은 것도 떠오르지 않고 해서, 결혼기념일이라고 회사에서 나온 문화상품권으로 책 두 권 샀다. 만날 풀꽃만 들여다보지 말고 와인에 대해서 좀 공부해보라고 하길래 와인에 관한 책과 내가 만날 관심을 기울이는 풀꽃에 관한 책을 한 권 샀다.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남편에게 결혼기념일이라고 특별히 뭘 챙겨줘 본 기억도 없다. 옛날을 들춰봐도 남편은 만난 지 백일이라고 가느다란 실 금반지도 하나 끼여 주고, 만난 지 이 주년이라고 귀고리도 사주고, 결혼 십 주년이라고 반지 사주고, 또 몇 주년이라고 목걸이 사주고 그러던데......

이다음에 결혼 20주년 기념일에는 남편 눈이 휘둥그레지게 뭘 선물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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