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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가을이 간다

by 눈부신햇살* 2007. 11. 19.

 

< 프로방스의 농가 - 고흐 >

 

 

올해는 단풍을 보러 산에도 들에도 바다에도 아무 데도 가지 못했다. 하다못해 다리 쫙 뻗으면 닿을 듯한 뒷산에도 오르지 못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매주 토요일에는 거의 일산으로 달려갔다. 비록 날라리 신자 같은 신앙생활이지만 주일에는 하나님을 뵈러 가야 하니

여유롭기는 토요일이 더 여유롭기 때문이다.

맨 처음 일산에 갔을 때에는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느티나무가 막 울긋불긋한 새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을 때였다. 제대로 단풍이 들면

느티나무도 붉은색으로 물들어서 붉은색으로 물든 놈, 노랑으로 물든 놈, 반은 붉은색이고 반은 노란색인 놈, 그중 느리게 물드는 놈, 일찌감치 물든 놈으로 그 길이 제법 아름다웠다. 느티나무 가로수 길이 시작되기 전에는 회화나무가 양쪽으로 심어져 있었는데 은행잎 같이 샛노랗게 물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입어 빛바랜 노란 옷처럼 누르팅팅하게 물이 들었다. 길가에 길게 조성한 달리거나 걷기에 좋을 듯한 공원에는 화살나무이거나 회잎나무일 것이 틀림없을 나무들이 붉게 붉게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수분기가 빠져 얇아진 나뭇잎들이 내는 제각각의 색을 맑은 기쁨이 올라오는 마음으로 바라보곤 했다.

그러던 것이 그다음 주에 갔을 때는 벌써 잎을 떨구고 반 나목이 되어 있었다. 그새 일주일새로 저렇게 차이가 날까?

지난주에 갔을 때는 거의 잎을 떨구거나 갈색으로 퇴색한 잎을 달고 있어서 화려했던 단풍의 시절은 막을 내리고 쓸쓸한 겨울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보였다. 보는 마음도 덩달아 괜스레 쓸쓸해져서 가만히 말했다. 하참, 그새 잎을 다 떨구다니......

 

그제, 차창 밖으로 고개 길게 내밀고 보니 작은녀석 학교 운동장가의 튤립나무도 잎을 반은 떨궜다. 올해 처음으로 튤립나무는 단풍조차도 아주 이쁘다는 것을 알았다. 

어제, 내가 바빠서 제대로 눈길 주지 못했던 집 옆, 학교 앞의 벚나무 터널도 잎을 털어내고 그 밑에 나뭇잎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노란색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란색으로 자신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은행나무들이 영하로 떨어진 기온 속에 바람이 불적마다 우수수 우수수 잎을 떨어뜨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무를 올려다보며 은행잎 비를 맞았다. 일부러 쓸지 않은 듯한 낙엽 깔린 길을 타박타박 걷노라니 절로 콧노래도 나왔다.

 

날이 추워지니 따뜻한 것이 그리워졌다. 점심으로는 떡볶이를 해 먹고 저녁으로는 얼큰한 수제비를 끓여 먹었다. 수제비는 반죽도 쫄깃쫄깃하고 다시마와 멸치로 육수 내서 끓이니 국물도 시원하고 감칠맛 났는데, 떡볶이는 물 계산을 잘 못해서 떡볶이가 아니라 어묵국 내지는 떡볶이국이라는 등 심한 질책을 받았다. 엄마표 음식이 제일이라고 곧잘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작은녀석만 내 기를 죽이지 않았다. 그나마 저녁의 수제비가 땅으로 떨어진 내 위신을 원상복구 시켜줬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대조영을 보는 남편 옆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더니 장난기가 도진 남편이 계속 귀찮게 했다.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하고, 뺨을 때릴 듯한 행동을 취해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더니 다리를 벌리고 앞으로 뒤로 허리를 구부렸다 젖혔다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다리 사이로 양발을 넣어 다리 사이를 무리하게 벌렸다. 앞으로 고꾸라져서 남편에게 쏠리게 할 목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내가 먼저 주저앉았다. 아직 온전하게 낫지 않은 발을 쳐서 심하게 통증이 왔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너무 아파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남편이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며 쳐다보자 괜스레 어리광까지 나서 눈물을 뚝뚝 쏟아내며 울다가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그러다 제정신이 돌아오자 시방 내가 열일곱 소녀도 아니고 뭔 짓이라냐,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큰 녀석이 무슨 일이냐며 나와서 묻는데 창피함이 머리끝까지 솟구쳐서 그냥 씩 웃고 말았다.

그저 그렇게 하릴없이 가을이 다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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