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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설 즈음

by 눈부신햇살* 2007. 2. 21.

 

 

 

설 쇠러 시골 가는 길가의 풍경이다.

파란 하늘 밑에 겨울 같지 않게 포근한 햇살이 내리쬐고 바람은 잠잠하다. 차창을 통해 뺨에 어깨에 와닿는 햇살이 따스하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다. 햇빛이 따가워서 잠을 자기 힘들다고 작은녀석이 투덜거렸다.

가까이 혹은 멀리 아직 새 잎이 돋아나지 않은 동화책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지들만 그려 놓은 빈 가지 뿐인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중에는 파란색 지붕이 유난히 눈에 띈다. 예전 시골집도 다시 짓기 전에는 파란색 지붕을 하고 있었다. 생활하기 불편하다고, 특히 겨울에 너무 추운 집 구조라고 새로 집을 지은 후에 어른들, 그중에서도 며느리들이 많이 좋아하는 반면, 우리 집 아이들은 시골집 특유의 운치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햇빛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양촌의 선산에 성묘하러 가다보면 아직도 방 한 칸, 광 한 칸, 부엌 한 칸,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마루로 이루어진 집들을 볼 수 있다. 아, TV문학관에나 나올 법한 집이다!라는 탄성을 지르며 아련한 향수에 빠져 들곤 한다.

저녁이면 동네에 나즉히 깔리던 밥 짓던 연기, 부지깽이로 들쑤시며 아궁이 앞에서 불 때며 저녁 짓는 것을 도우던 나, 샘과 광과 부엌을 드나들면서 저녁 준비를 하던 할머니...... 햇빛 좋은 날, 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발을 앞뒤로 흔들며 함께 새살떨던 동무들...... 이제는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되어 버렸다.

 

설 하루 전에는 하늘이 잿빛으로 무겁게 내려앉으며 빗방울도 간혹 내리더니 설날 아침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간 얼굴로 반짝 해가 떴다. 성묘를 따라갈까 말까 망설이다 바람이나 쐬자,하는 기분으로 따라나섰다. 막내 동서와 발가락이 다쳐서 걷기가 불편한 큰 조카만 집에 남고 나머지 대식구는 세 대의 차에 나눠 타고서 성묘를 갔다.

밭에는 개불알풀들의 싹이 돋아나고 냉이도 눈에 띄었다. 시골 태생인 둘째형님이 탄성을 지르며 냉이를 캐자고 한다. 어머니와 큰 형님, 둘째 형님, 나 넷이서 달라붙었다가 나는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배추 밭이었는데 겨울에 먹잇감이 부족한 토끼가 이따금 내려와서 뜯어먹었는지 군데군데 실례를 해 놓았다. 비위가 상당히 약한 나는 그만 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 뜯지 않겠다고 했더니 풀만 먹고 똥 싸는 토끼똥이 뭐가 그리 더럽냐고 나무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도저히 뜯을 기분이 들지 않아서 "나는 절대로 못 뜯어!" 한마디 한 후에 팔을 휘저으며 차 있는 곳으로 갔다. 중간에 왜 여자들이 오지 않는지 궁금해 여자들 있는 곳으로 오던 시동생이 "왜 혼자서만 농땡이를 피시나?" 하고 농을 걸어왔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역시나 토끼똥이 뭐가 더럽냐는 것이다. '저,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긴데요. 토끼똥도 더럽거든요!'

 

여러 가족이 모이니 제각각 형편과 사정도 다르다. 술술 잘 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갈수록 힘들다는 사람. 생기가 도는 사람, 풀이 죽은 사람. 피어나는 꽃같은 조카들이 있는가 하면, 잔주름이 늘어가는 어른들. 키가 쑥쑥 큰가 하면 어디 한 군데씩 아파지고......

꽃도 피는가 하면 시들듯이 사람도 크는가 하면 늙는 것이겠지. 나는 그 길의 중간쯤에 서있는 것일까?

 

언제나처럼 대식구가 모여서 복작복작거리다가 연휴가 끝나갈 즈음에 바리바리 싸주는 약콩과 팥과 보리쌀과 그 외의 갖가지 것들을 차에 가득 싣고 각자의 갈 길로 갈라서 갔다.

우리 식구는 서울의 친정으로 갔다. 다른 동생들은 설 전 날과 설 당일에 다녀간 후인 설 다음 날에 친정에 도착하니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동생네 식구만 있다. 지난번에 얼굴 보면서 아이들이 커서 안 보는 책 있으면 좀 가져오라고 해서 얼마 전에 집 앞에다 내놓아서 동네 아주머니들 좋은 일 시켰는데 진작 말하지, 하며 삼국유사 시리즈와 그리스 신화 시리즈를 가져갔다. 백 권짜리 창작동화는 자리를 많이 차지함에도 그림들이 너무 예뻐서 할 일 없어 한가로운 노년에 내가 한 페이지씩 한 페이지씩 펼쳐 보려는 욕심에 아직은 누구에게도 줄 마음이 들지 않는다.

 

가져간 책 중에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라는 책이 있다.

 

 

 

하루는 해가 떴나 안 떴나 보려고 굴 밖으로 쑥 고개를 내민 두더지의 머리에 갈색을 띤 긴 소시지 같은 것이 떨어졌는데, 그 괘씸한 똥의 주인을 찾아 나서는 내용이다. 까만 사과 같은 똥을 싸는 말과 묽은 하얀 똥을 싸는 비둘기와 까만 콩 같은 똥을 싸는 토끼, 냄새가 지독해서 코를 싸쥐게 만드는 돼지똥, 까만 새알 초콜릿 같아서 두더지 마음에 쏙 드는 내 조카 유진이의 마음에도 쏙 드는 똥을 싸는 염소와 촤르륵 묽은 똥을 한 무더기 싸는 젖소를 찾아가서 두더지는 물어본다.

"네가 내 머리에 똥 쌌어?"

동물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나? 아니야. 내가 왜? 내 똥은 이렇게 생겼는 걸."

나중에 두 마리의 똥을 즐기는 파리의 도움을 받아 똥의 임자는 정육점 개 뚱뚱이 한스라는 것을 알아내고 개집 위로 올라가 복수를 한다. 개의 머리 위에 까맣고 작은 곶감 씨 같은 똥을 싸주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 아이들이 그랬듯이 조카 유진이의 마음에 쏙 들었다.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않았다. 올해 유치원에 들어가게 되는 이쁜 조카 유진이.

 

 

 

아쉽게도 사진이 흐리다.

 

 

 

친정에 도착한 날 오후에 엄마와 둘이서 뒷산에 올랐다.

산은 사람들로 복작복작 바글거렸다. 허리 돌리는 운동 기구에 서서 허리도 돌리고, 윗몸 일으키는 기구에서 윗몸일으키기도 하는 나에 비해 그저 엄마는 가만히 앉아서 나 하는 양만 바라보며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으신다. 엄마와 얘기할 때는 조금 불편하다. 어릴 적에 한쪽 고막을 다친 엄마는 조금 귀가 어둡다. 그런 엄마를 배려해 큰소리로 얘기하다 보면 지나치는 사람들과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까지 얘기 내용을 다 알게 된다. 더러는 속삭이고 싶은 얘기도 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 내가 이렇게 불편하다고 느낄 때 엄마는 얼마나 불편한 세상을 살아오셨을까 싶다. 그래도 아직도 동네 아저씨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이쁘다고 한다고 자랑이 늘어지신다. 내려와서 동생에게 살짝 엄마 흉을 봤다.

"야, 나이 들어도 이쁘다는 소리가 좋긴 좋은가 보더라. 엄마가 자랑하더라." 

 

엄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세요!

날이 풀려 햇볕이 따뜻하게 등과 어깨를 내리쬐면 엄마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바다에 가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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