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 또 하루

by 눈부신햇살* 2006. 5. 10.

 

 

 

산이 연둣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은 연두도 가지가지 연두로 저만의 연둣빛을 뽐내지만 그래서 멀리서도 한눈에 저 나무는 무슨 나무인지 알아볼 수 있지만 한여름이 되면 모두 다 한결같이 진초록으로 짠 듯이 옷을 갈아입어서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모두가 한 덩어리 한 몸으로 보인다. 그러다 가을이면 저마다의 단풍빛으로 각자의 옷을 또 뽐낸다.

 

모두다 새순을 내놓는 중에도 늦도록 옷을 갈아입지 않던 내가 좋아하는 이태리포플러는 어느 아침 느닷없이 옷을 갈아입고 한순간에 멋쟁이가 되어서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오게 했다. 역시 포플러야! 여름이면 반짝이는 햇살에 팔랑거리며 빛나겠지. 팔랑팔랑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며 귀염을 떨고, 보는 이의 눈도 시원하게 만들겠지.

 

우리 동네는 번화하지 않아서 지나다니는 길목에서도 쉽게 풀꽃들을 볼 수 있다. 오늘 아침엔 발밑을 쳐다보다가 아주 작은 정말로 눈곱만 한 꽃을 발견하고 신기해서 몸을 수그리고 내려다보았다. 이쁘다! 하는 감탄사가 가슴속에서 저절로 올라왔다. 연보랏빛의 꽃잎 안에 노란 수술. 그 작은 꽃송이도 갖출 건 다 갖췄다. 얼마나 앙증맞은 아름다움인지. 흔히 접사로 찍어와서 일찍이 눈에 익은 '꽃마리'라는 꽃이었다. 이다지도 작을 줄이야.

 

그 옆에는 새끼손톱만한 '별꽃'도 피어 있다. 정말 하늘의 별이 땅에 내려와 반짝이고 있는 것 같다. 하늘의 별과 땅 위의 '별꽃', 누가누가 더 아름다울까. 내게 묻는다면 나는 말하리. 하늘의 별도 아니고, 땅의 별꽃도 아니고, 그대의 눈동자에서 빛나던 별이라고.

 

어느 밤, 한잔 마시고 온 남편이 나를 불러냈다. 집 앞에서 한잔 더 마시자고. 그즈음 막 고향 친구들과 만나기 시작한 남편은 모든 것이 신기해서 틈만 나면 나를 붙들고 그 얘기를 하고 또 하고 했다. 술이 한잔 들어가서인지 메일을 주고받은 얘기도 했다. 남편이 모임 때 사진을 찍어와서 보내주면서 어쩔 수 없이 메일로 보내게 되었는데, 굳이 내게 하지 않아도 될 얘기인 것 같은데, 감출 게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미주알고주알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얘기에 휩쓸려 나도 털어놓게 되었다.

 

"나는 말야.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이뻐'라고 어느 녀석이 말하는데, 아, 고 녀석 말도 참 이쁘게 한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데 그 눈에서 별이 빛나는 거 있지. 그 눈 참 이쁘더라."

 

일순간, 경직된 얼굴 표정.더이상 얘기하지 말란다. 술맛 떨어지니 집에 가잔다."가지 뭐."하고 호프집을 나섰다. 그리고 성질난다며 씰룩씰룩 앞장서서 마구 걸어가더니 팩 고꾸라져서 잠이 들었다. 그 후 어느 날인가, 또 친구 얘기, 메일 얘기를 꺼내길래"알아, 알아. 당신이 다 얘기했잖아."그랬더니 무척 놀라는 표정으로"어, 내가 다 얘기했어?"되묻는다. 그러니까되묻는다. 결론은 그 녀석 눈 속에서 빛나던 별이 가장 아름답다는 나의 말은 남편의 기억 속에 없는 것이다. 술이란 그렇게 요술을 부리기도 하나.

'하루 또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까시 꽃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0) 2006.05.22
산길에서  (0) 2006.05.15
조카  (0) 2006.04.30
황사  (0) 2006.04.09
거짓말  (0) 2006.03.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