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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열함

선택의 기준

by 눈부신햇살* 2005. 6. 9.


 

 

어제 켜놓은 라디오에서 남자들이 자주하는 3대 거짓말과 여자들이 자주하는 3대 거짓말에 대해서 나왔다.

 

남자들이 자주하는 3대 거짓말

1. 상가집에 가야 돼.

2. 보너스는 절대로 안 건드리고 다 가져온 거야.

3. 내일부터 운동할 거야.

 

여자들이 자주하는 3대 거짓말

1. 내일부터 다이어트 할 거야.

2. 처녀적에 나 좋다고 쫓아다닌 남자들이 줄을 섰었어.

 

세번째는 잘 기억이 안난다.

 

내가 가장 많이 공감한 말이 '처녀적에 나 좋다고 쫓아다닌 남자들이 줄을 섰었어'이다.

많이 쫓아왔더랬다. 썩 이쁘지도 않고, 키도 작고, 애교가 많지도 않고, 멋쟁이도 아니였는데, 참한 맛이 있었을까, 순해 보여서 딱지 맞을 위험성이 없어 보였을까, 아무튼 많이 따랐다.

 

일기장을 한 권 써서 건네주던 사람, 근 일년 동안을 마음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마 해놓고 생일이면 꽃다발을 회사 앞 가게에 맡겨 놓고 찾아가라던, 간식으로 먹으라고 고로케 같은 것을 듬뿍 사서 우리 부서로 들이밀던 직장 동료였던 사람 -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나인지 모르고 엉뚱한 사람에게 덕분에 잘 먹겠다고 인사를 하는 상사를 보고 마음 속으로 웃기도 했다- 출근길에 며칠 쫓아오길래 어딜 감히,하는 마음으로 꿈쩍도 안했더니 제풀에 나가 떨어진 회사 옆의 카센터 주인 총각, 그 외에도 자질구레하게 차나 한 잔 마시자는 말도 참 많이도 들었다.

 

스스로를 과히 예쁜 얼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나는 왜 하필이면 나야,하는 의구심 끝에 내게 데이트 신청하면 딱지 맞을 위험부담이 없어서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하면서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듣게 된 말이 콧대가 높다였던가, 아이러니 하게도......

 

그러다보니 스물다섯이 되도록 뚜렷하게 내세울만하게 애인 한번 만들어보지 못하고 무심한 세월만 흘렀다. 그점이 이상해 보였던가. 영업부의 직원 한분이 자신의 고향 친구 중에 꽤 괜찮은 녀석이 있는데, 소개 한번 받아보라고 했다. 싫다고 했다. 아직까지도 어느 날 우연히 홀연히 찾아드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고 있었던가. 둘 다 괜찮은 사람들인데 혼자인 것이 안타까워서 그런다고 중간에서 꽤 노력을 했다. 정성이 갸륵해서 선심 쓰듯이 약속을 정했다.

 

유월의 막바지인 한국전쟁기념일 하루 전날, 건대 옆 화양리의 카사블랑카에서 처음 만나던 날, 그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첫인상이 좋았다. 그제나 이제나 썩 잘생긴 미남형을 선호하지 않아서 평범한 얼굴에, 깔끔한 외모에, 편안한 미소가 높은 점수를 주게 되었다.

 

식사 도중에 그가 "참 얼굴이 밝아요."한 한마디도 점수를 높였다. 예뻐요,란 말보다 훨씬 신뢰감을 주는 말이라고, 자신이 과히 예쁜 얼굴은 아니라고 믿고 있던 내게 들게 한 생각이였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면서 첨가하게 되는 크림과 설탕을 넣으면서 둘이서 질질 흘렸다. 묘하게 떨렸다. 둘 다. 호감의 시작이였다.

 

자리를 옮겨 술을 마시게 됐다. 말을 조곤조곤 잘하는 잔재미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인연이 될라고 그랬는지 끊임없이 나즉나즉 이 말 저 말을 늘어 놓는 그에게 나는 이따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만 쳤다. 편했다. 예전에 가끔씩 만나곤 했던 동창녀석은 자신의 말을 마치고선 늘 입버릇처럼 "자, 이제 네가 재밌는 얘기 좀 해봐." 할라치면 갑자기 막막해져서 등이 쭈뼛해지곤 했다.'도대체 뭔 얘기를 하라는 게야......'하는 생각으로.

 

헤어질 때쯤, 일요일인 내일은 뭐할거냐고 물었다. 아직 계획 없다는 내 말에 그럼 내일도 볼까요? 하고 물었다. 망설이는 듯 하다가 그래요, 했다.

 

다음 날, 약속장소인 건대역에 도착해 보니 감색 티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에 단화 스타일의 흰색 운동화에 날씬한 몸매에 큰 키의 그가 서 있었다. 속으로 감탄사가 나왔다. '와우, 꽤 멋있는데......'

 

한강둔치에 갔다. 초여름 날씨치고 꽤 더웠다. 무엇이던지 늦게 먹는 식습관이 있는 나는 아이스크림을 폭 넓은 스커트에 질질 흘렸다. 길을 가던 그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더니 손수건을 꺼내 스커트와 구두까지 닦았다.

 

잔디밭에 앉았다. 그가 말했다.

"그거 알아요? 사랑은 둘이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거."

 

나이 스물다섯에 비로소 애인이라고 내세울 만한 남자가 생겼다. 새로운 경험이였다. 애인이 있다는 기분이 이런 거구나. 나는 그렇게 많은 말들을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저 그 남자가 이끄는 대로 끌려 다녔고, 그것이 편하고 좋았다. 내 앞에만 오면 주눅이 든 사람들처럼 쩔쩔 매고, 말도 몇마디 못하던 사람들보다 편한 모습으로 행동이 자연스럽고, 만남을 주도해가는 그의 모습이 듬직해 보였다고나 할까.

 

3년의 연애 기간 동안, 두어번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결혼을  했다. 아이를 낳고, 그 2년 후에 작은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사는 동안 저절로 깨달았다. 내 앞에서 주눅 들어하고, 쩔쩔매던 사람들 바보여서 그런 거 아니였는데...... 난 그걸 남자답지 못하다고, 패기가 없다고 판단했구나.

 

어쩌면 그 사람들 중의 하나와 결혼 했더라면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고, 내 주장이 늘 앞서고, 큰소리 뻥뻥 치면서 살았을 것을, 아니 연애도 결혼 생활도 더 달콤하고 부드러웠을 텐데......연애 시절,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조리 다 단점으로 둔갑을 하고 싸움의 빌미가 되곤 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내가 좋아서 내 앞에만 오면 입도 제대로 떼지 못했던 건데, 그런 사람들과 결혼 했어야 내가 왕비 대접을 받고 사는 건데......"

 

아, 나는 아직도 달콤한 연애를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지하철 같은 데서 간혹 지나친 애정 표현으로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정도만 지나치지 않으면 왜 나는 저런 연애도 못해봤을까,하고 알게모르게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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