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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나열함

친구

by 눈부신햇살* 2005. 5. 29.


[ 그림 - 서정 육심원 ]

 

몇 살적부터 친구라는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고 받아 들였을까?

초등학교 시절에 삼총사를 본떠서 이름 붙인 '사총사'라는 친구들이 있었다. J, N, M, 그리고 나.

졸업 사진 찍을 때, 넷이서 사총사 기념으로 찍은 사진도 오래토록 지니고 있다가 엄마와 동생들

의 "너무 못 생겼어! 그때는 왜 그렇게 이상하게 생겼었어? 크느라고 그랬나? 시골 바닷바람에 망

가졌나?......" 하는 놀림에, 그 놀림의 거슬림이 최고조로 달하는 날 그냥 북북 찢어 버렸다. 이제사 아쉬움이 크다.

 

초등학교 졸업 후 이십대 때에 잠깐 얼굴 보고, 그후로 십오여년만에 다시 얼굴을 보게 된 우리.

J는 그때나 지금이나 명랑하고, 인정 많고, 마음씨 좋은 넉넉한 전형적인 아줌마 타입이다. 살림

도 잘할 것 같다. 사치나 허영과는 거리가 먼 알뜰한 아줌마...... 어린 시절, 집에 놀러가서 보았

던 J의 친정 엄마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이를 먹고 있는 것 같아서 절로 미소가 지어질 때가 있다.

 

N은 어린 시절에 가장 많이 자주 어울려 놀았던 친구이다. 그 시절 왠만한 외국영화는 다 그애네

집에서 뭉개고 놀면서 봤다. 외국영화가 유달리 기억에 남는 이유는 진한 애정 표현 때문이다. 눈

길을 뗄 수가 없었다. 아니 은근한 조바심 내지 기대로 그런 장면을 기다렸을까. 조숙했나보다.

그 애가 우리집으로 놀러오는 적도 드물게 있었다. 그 애도 나 못지 않게 조숙했나보다. 그런 쪽

의 얘기를 햇빛 좋은 우리집 마루에 드러누워 발 까딱거리며 즐겼으니까. "누구랑 누구랑 어쨌대.

..... 누구 형네 부부가 어떻고 저떻고...... " 앙큼하기 짝이 없는 대화를 즐겼다.그 애도 그 시절의

그런 대화를 기억할까?

 

어느 무더운 여름날, 놀러 온 그 애와함께 목욕을 한 적이 있다. 우리집 마당은 경사진 언덕의 끄

트머리에 있던 집이라 동네 어른들이 점방에 물건이라도 사러 갈라치면 훤히 보이는 단점이 있었

다. 하여 옷을 벗지 못하고, 이미 조숙함에 접어든 나이인지라 옷을 입은 채로 차가운 펌프물을

품어 올려 머리 끝에서부터 팍팍 뒤집어 쓰는 것이었다. 비록 반소매의 웃도리와 반바지를 입은

채로였지만 부서지는 찬란한 햇빛 아래 둘이서 깔깔거리며 찬물을 뒤집어 쓰는 그 기분은 경험

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짜릿한 상쾌함이 있었다. 이리저리 마구 튀는 물방울들, 그와 함께 퍼져 나가던 우리들의 맑은 웃음 소리......

내 옷을 빌려 입고 있다가 여름의 쨍한 햇빛에 금세 마른 그 애 옷을 입고 해질녘에 돌아갔다.

 

그 애는 우리 사돈이기도 했다. 그래서 고모네 집이기도 한 그 애네 집에 가서 날 저무는 줄 모르

고 노노라면 들일에서 돌아온 고모가 대식구의 저녁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한 모습을 자주 봤다.

그 저녁을 준비하는 틈틈이 어린 것의 젖을 물리던 모습, 급하게 저녁을 지어서 그 저녁이 팥죽이

라도 되는 날엔 유난히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조카를 위해 찬물에 띄워 놓고 식히면서 먹으

라고 바가지에 팥죽을 퍼주곤 했다. 젊고 이쁘던 젊은 엄마의 고모 모습, 언제나 엉덩이 붙일 새

도 없이 늘 바쁘던 고모 모습......

 

M은 예쁜 아이로 통했다. 나는 그 애를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그 감정이 결코 질투심

에서 우러난 감정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결국은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3학

년 겨울 방학에 전학가게 돼서 그전 학년에 어떠했는지 잘 모르는 내게 친구들이 들려준 바에 의

하면 1학년과 3학년, 두 해를 담임 맡게 되신 선생님께서 유달리 그 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총

애를 한다고 했다. 소풍이라도 갈라치면 꼭 화장을 하고 나타나는 아이였다.

나중에 다 성장해서 서울에 직장을 잡아 올라온 그 친구가 우리집에 놀러 왔던 날, 우리 엄마 완

전히 M에게 반하셨더랬다. "어떻게 이렇게 이쁘게 생겼다냐? 우리 딸들 중에는 이렇게 이쁘게 생

긴 딸이 왜 하나도 없을끄나?......" 아이구, 하나님 맙소사였다. 그래도 나도 나 나름대로 밖에 나

가면 예쁘다고 쫓아다니는 남자가 수두룩했건만, 딸의 면전에서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그리 하

시는지 쓴 웃음만 나오고, 기가 죽었다. 아니 그때는 내 눈에도 그 친구가 퍽 예뻐 보였다.

가무잡잡하고, 화장도 안 하고, 수수한 것이 최고라고 여기던 나는 만날 청바지 쪼가리나 걸치고

다니던 때였는데, 화사한 화장에 뽀얀 피부, 세련된 옷차림의 그 친구의 모습은 눈이 휘둥그래지게 예뻤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맨처음 짝꿍이 되었던, 피부가 뽀얗던 친구는 집이 만화가게를 했다. 덕분에

만화 좀 봤다. 어린 시절에 작은아버지께서 만화 가게를 했던 터라 맨처음 그 애네 집에 놀러 갔

던 날, 그 낯익은 풍경이 마음을 사로 잡았다. 널판지를 잇대서 만든 의자 몇 개와 수두룩하게 꽂

혀 있던 만화책의 냄새, 고개 숙이고 읽는 사람들......

어느 봄날, 사직공원에 둘이서 놀러간다고 나오다가 그네 언니에게 붙들려서 자기 동생 꼬셔내서

나쁘게 행동한다고 야단 맞았다. 그후로도  사소한 오해가 잦아지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슨 일을 먼저 저지를 성품이 못되는 내가 참 많이 억울해 하던 기억......

나중엔 둘이서 보고도 본척만척 하기에 이르렀었다.

 

그리고 나이가 한 살 많았던 친구겸 언니. 서점을 했다. 또 덕분에 책 좀 봤다. 언니네 가게에 들

어서면 쪼로록 나란히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면 괜히 가슴이 뛰곤 했다. 아쉬운 것은 '햄릿'과 '멕베

드' 외에 무슨 책을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읽었던 책들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저장되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언니와는 묘하게 썩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한 살이라는 나이

차이 때문이었을까.

 

그 다음이 S라고 하는 B형 특유의 성격을 가졌던, 나중에 서울에 와서도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내 문장력(문장력이 있지도 않지만 그나마......)의 80%는 편지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방학 때면 서울 친척집에 다니러 오는 그 애와 고대도 가고, 남산에도 가고, 눈

이 펑펑 쏟아지던 날에 장안평에서 만나 돌아다니기도 했다.

어느 소나기 쏟아지던 날,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비를 흠뻑 맞고 그 애 집에 놀러갔던 적이 있다. 어찌 그리 미련했던지, 소나기였으니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잠시 피해도 됐으련만

...... 서울로 대학교를 오고자 했던 그 애가 시험에 낙방하고나서 연락이 끊겼다. 김제의 고향집

으로 편지를 띄워도, 광주의 집으로 편지를 띄워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지금도 가끔씩 안부가 궁금하다.

 

그런 S를 슬픔에 빠트릴 정도로 급속도로 가까워진 친구가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서울에서 광

주로 전학왔던 아이였다. 둘이서 허리를 꼭 붙잡고, 엉덩이가 부딪칠 정도로 서로 꼭 껴안고 교정

을 거닐던 친구. 함께 네잎 클러버를 따러 다녔던 친구. 나를 위해서 자신의 자취집에서 맛있게

밥상을 차려주던 친구. 초야,하고 다정한 부름으로 부르고, 그도 모자라 틈틈이 쪽지를 써서 건네

주던 친구. 거꾸로 나는 서울로 전학오면서 두 번의 편지를 끝으로 연락이 끊겼다. 내가 전학온

후로 학교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소식을 모른다.

 

서울에 와서 친해진 친구가 다른 친구들이 서로 사귀는 줄 알았다던 친구이다. 둥글둥글하게 생

긴 이름처럼 얼굴도, 눈도 둥글둥글하게 생긴 친구이다. 앨범 속을 거의 차지하고, 토요일, 일요

일이면 더욱더 붙어 있고, 함께 교회를 다니고, 함께 낮잠을 자고, 함께 휴가를 가고, 함께 친구의

고향집에도 가고, 함께 같은 옷을 입고 쌍둥이냐는 물음을 받고, 함께 다른 친구들과도 만나고,

함께 직장도 다니고, 함께 애인을 만나고, 그 무엇이든지 함께 하던 친구였다.

이담에 둘이서 같은 집에 아래 위로 살자고 약속했던 친구이다. 지금은 너무 멀리 살아서 얼굴 본

지가 까마득하다.

 

요즘은 모임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가장 가까운 친구인 것 같다.

눈에서 멀면 마음 마저 멀어진다고 하는데, 그래도 정작 마음 속 깊은 이야기는 멀리 떨어져 살아

서 몇년을 보지도 못하는 친구에게 털어 놓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 모임의 친구들이 섭섭타고 할

려나. 그래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애와 내가 함께 한 시간, 함께 공유했던 것들이 얼만데,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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