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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방

이름 뒤에 숨은 사랑

by 눈부신햇살* 2024. 1. 12.

 



  아시마는 요즘 들어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 임신한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림은 끝도 없고, 언제나 버겁고, 끊임없이 남과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한때는 평범했었던 삶에 이제는 불룩하게 괄호가 하나 삽입되었고, 이 괄호 속에는 끝나지 않는 책임이 들어 있었다. 이를 통해 이전의 삶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그 삶은 오히려 더 복잡하고 힘든 무엇인가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임신했을 때처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호기심과, 그리고 동정심과 이해심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자아내는 어떤 것이라고, 아시마는 생각하였다. - p.71
 
 
  외국 생활 10년 만에 그들은 고아가 되었다. 아쇼크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암으로 돌아가셨고, 아시마의 어머니는 신장 질환이었다. 고골리와 소냐는 새벽녘에 이런 죽음들로 인해, 얇은 침실 벽을 사이에 두고 부모님들이 지르는 외마디 소리에 잠을 깨곤 하였다. 잠이 덜 깨어 비틀거리며 안방으로 가면, 부모님이 우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고 당황스러웠다. 그냥 조금 슬플 뿐이었다. 어찌 보면 아쇼크와 아시마는 아주 늙은 사람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알던 사람들, 사랑하던 사람들을 모두 잃은 채 기억만으로 위안을 삼으며 살아남은 사람들. 아직 살아 있는 가족들까지도 어떻게 보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볼 수도 없고 손에 닿지도 않는 곳에 있었으니까. 이따금씩 누가 태어났고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화를 받으면 등골이 오싹해질 때가 있었다.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고 말을 하고 있을까? 몇 년에 한 번씩 캘커타에 가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머무르는 6주나 8주는 꿈처럼 지나갔다. 일단 집으로 돌아오면 별로 크지도 않은 펨버튼 로드 집이 새삼스레 거대하고 느껴졌고, 집 안에는 친척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백 명에 가까운 친척들을 방금 보고 왔음에도 이 세상에 강굴리는 그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함께 자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이 삶을 결코 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들은 축축한 뉴잉글랜드의 아침 공기를 마실 일도, 이웃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일도, 차 안에서 엔진이 데워지고 유리창에 성에가 녹을 때까지 떨면서 기다릴 일도 없는 것이다. - p.80
 
 
   고골리가 어렸을 때는 자기 이름을 싫어하지 않았었다. 고 레프트(왼쪽으로 가시오), 고 라이트(오른쪽으로 가시오), 고 슬로(천천히 가시오)와 같은 길거리 표지판에서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곤 하였다. 생일이면 엄마는 하얀색 크림 위에 단맛이 나는 하늘색 글씨로 그의 이름을 새긴 케이크를 주문하였다. 모든 것은 아주 정상적인 듯하였다. 열쇠고리나 금속 브로치,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을 살 때 자기 이름을 새긴 것을 살 수 없다는 것이 크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전 세기에 태어난 러시아 작가의 이름을 따른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작가의 이름은―따라서 그의 이름도―전 세계에 알려져 있고,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것도. 어느 날 아빠는 고골리를 데리고 대학 도서관에 가서, 고골리의 손이 아직 닿지 않는 책장 위에 한 줄로 꽂혀 있는 고골리의 책등을 보여주었다. 아빠가 그중 한 권을 꺼내어 아무 데나 펼쳤을 때, 거기에 인쇄되어 있는 글씨는 고골리가 요즘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하디 소년 시리즈보다 훨씬 작았다. "몇 년 안에 이 책들을 읽을 수 있게 될 거다." 아빠가 그에게 말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출석부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면 언제나 잠시 멈추고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어, 고골리는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이렇게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다. "저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선생님들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 2년이 지나자 아이들도 `기글(낄낄거리다)'이나 `가글( 안을 가시다)'로 부르며 놀리지 않았다. 학교 크리스마스 연극의 계획표에서 출연자 명단에 들어 있는 그의 이름에 학부모들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고골리는 뛰어난 학생입니다. 호기심이 많고 협조적입니다.' 선생님들은 매년 성적표에 이렇게 적었다. "고, 고골리(뛰어라, 고골리)!" 황금빛 가을날 고골리가 베이스 사이를 달리거나 단거리 경주에서 뛸 때면  같은 반 친구들은 이렇게 외쳤다.
  그의 성 강굴리에 대해서는, 열 살이 될 때까지 모두 세 번―여름에 두 번 갔고, 한 번은 푸조 축제 때였다―다녀온 캘커타에 가장 최근에 갔을 때, 친할아버지댁의 하얗게 칠한 벽에 자랑스레 새겨져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캘커타 전화번호부에서 강굴리라는 성이 한 장에 세 줄씩, 여섯 장에 걸쳐 꽉 차게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을 기억하였다. 그는 이 페이지를 찢어 기념으로 가져가고 싶었는데, 그것을 사촌 한 명에게 말하자 웃었다. 여러 친척들의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아빠는 다른 곳에도 씌어 있는 그의 성을 가리키곤 했는데, 제과점이나 문구점, 안경점의 차양 위에서였다. 그는 고골리에게, 강굴리는 영국의 유산이라고, 원래는 강고파디아이가 영국식으로 변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펨버튼 로르 집에 돌아와서, 고골리는 아빠가 철물점에서 산 금속으로 된 금색 글자판으로 우체통 위에 `강굴리'라고 배열하여 붙이는 것을 도와드렸다. 할로윈 다음날이었던 어느 날 아침, 고골리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우체통의 글자가 `강GANG'으로 줄어 있고, 그 뒤에는 연필로 `그린GREEN'이라고 휘갈겨 쓴 것을 발견하였다(붙여 읽으면 `강그린gangrene(괴저병)'과 동음이의어가 된다―옮긴이). 그것을 보자 그는 귀가 뜨거워지고 구역질이 나 집으로 다시 뛰어들어왔다. 아빠가 모욕감을 느끼실 것 분명했다. 자신의 성이기도 했지만, 이런 모독은 자기나 소냐를 향한 것이라기보다 부모님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골리는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가게에서 점원들이 부모님의 억양을 비웃는다는 것, 그리고 세일즈맨들은 그의 부모님이 마치 바보나 귀머거리라는 듯 고골리에게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빠는 그런 순간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고, 이번 우체통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얘들이 그냥 장난친 거야." 그는 고골리에게 이렇게 말하며, 손등으로 글자를 문질러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다시 철물점에 가서 없어진 글자들을 샀다.
  그러던 어느 날, 고골리의 이름이 별나다는 사실이 더 명백해지는 일이 있었다. 열한 살 때, 그러니까 6학년이었던 고골리는 어느 날 역사 시간의 성격을 띤 현장 학습에 나가게 되었다. 두 개의 반과 두 선생님 그리고 보호자 두 명이 스쿨버스에 함께 타고 마을을 곧장 통화하여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쌀쌀하면서도 화창한 11월 날씨였다. 파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고, 나무에서 떨어진 노란 잎새들이 담요처럼 땅을 뒤덮고 있었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불렀고, 알루미늄 호일에 싼 캔 음료수를 마셔댔다. 첫 방문지는 로드아일랜드 어딘가에 있는 섬유공장이었다. 다음은 널찍한 대지 위에 지어진 작은 나무집이었다. 집은 페인트칠도 되어 있지 않았고, 창문도 아주 작았다. 안으로 들어가 어두운 실내에 적응하고 나니, 잉크병이 놓여 있는 책상과 검댕투성이의 벽난로, 그리고 빨래통과 짧고 좁은 침대가 보였다. 어떤 시인의 집이었다고 하였다. 가운데 공간을 비워두고 가장자리로 배열된 방 안의 가구들 앞에는 `손대지 마시오'라는 표지판과 함께 밧줄이 가로질러져 있었다. 천장이 너무 낮아서 선생님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두운 방들을 지나다녀야 했다. 부엌에 가보니 무쇠 스토브와 돌로 만들어진 싱크대가 있었다. 그리고 밖에 있는 변소를 보기 위해 줄지어 흙으로 된 길을 걸어갔다. 변소는 나무 의자 밑에 양철판을 매달아 놓은 것이었는데, 이것을 본 아이들은 역겹다고 비명을 질렀다. 기념품 가게에서 고골리는 그 집의 사진이 들어 있는 엽서 한 장과 깃처럼 생긴 볼펜을 샀다.
  현장 학습의 마지막 도착지는 시인의 집에서 버스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그 시인이 묻혀 있다는 묘지였다. 그들은 얼마간 비석들 사이를 걸어 다녔다. 비석 중엔 얇은 것과 두꺼운 것이 있었고, 어떤 것들은 바람에 못 이긴 듯 뒤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색깔은 검은색 아니면 회색이었고, 모양은 반듯한 네모가 아니면 아치  모양이었다. 광택이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것이 많았고, 대부분 이끼로 덮여 있었다. 비석에 새겨진 문구는 거의 닳아 지워진 것이 많았다. 그들은 그 시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찾았다. "여기 줄을 서봐." 선생님들이 말했다. "이제부터 할 일이 있다." 그리고는 학생들에게 갱지 몇 장과 상표가 벗겨진 두꺼운 크레파스를 나누어주었다. 고골리는 어쩔 수 없이 소름이 끼쳤다. 묘지라는 곳은 지나가면서 차 안에서만 언뜻 보았을 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사는 동네 외곽으로 큰 공동묘지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길이 막히는 바람에 그와 가족들은 멀리서 장례식을 보게 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묘지 앞을 지날 때마다, 엄마는 언제나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리라고 말씀하셨다.
  비석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비석 위를 문지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고골리는 깜짝 놀랐다. 선생님 중 한 분이 웅크리고 앉아, 한 손으로 갱지를 비석 위에 놓고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셨다. 아이들은 줄지어 잠들어 있는 고인들 사이를, 가죽처럼 반질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뛰어다녔다. 그리고 자기들의 이름이 있는지를 찾았다. 아이들 가운데 몇 명이 자신들과 관련이 잇는 무덤을 발견하였다. "스미스!" 승리에 찬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콜린스!" "우드!" 고골리는 여기에 강굴리가 있을 턱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 만한 나이였다. 그리고 자신이 죽더라도 매장되지 않고 화장될 것이기 때문에 그의 몸은 땅 한 조각 차지하지 않을 것이고, 이름이 적힌 비석도 이 땅에 세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캘커타에 갔을 때 한 번은 택시에서, 한 번은 할머니 할아버지댁의 지붕 위에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지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천으로 말아 감싼 시신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는 가느다란 검은색 비석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비석은 모양이 좋았고, 십자가가 달린 꼭대기는 보지 좋게 둥글려져 있었다. 그는 풀밭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갱지를 비석에 대고 그 위를 크레파스로 문지르기 시작하였다.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손가락은 시리다 못해 뻣뻣해졌다.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은 비석에 몸을 기댄 채, 땅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그들이 피우는 멘톨 담배의 향이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우둘투둘하고 형체가 없는 진한 파란색의 크레파스 색깔 이외에는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크레파스에 무언가 걸리는 것 같더니, 신기하게도 글자가 하나둘씩 종이 위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아비야 크레이븐, 1701~45. 고골리는 아비야라는 이름의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기 말고는 고골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본 적이 없듯이. 고골리는 아비야를 정확히 어떻게 발음하는지, 남자 이름인지 아니면 여자 이름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키가 30 센티도 되지 않는 다른 비석으로 걸어가 종이를 대고 그 위를 문질렀다. 이번에는 앵귀시 메이서, 어린아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땅 밑에 그와 비슷한 크기의 뼈가 묻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른 아이들은 벌써 싫증이 났는지, 서로 밀고 장난치고 고무총을 튕기면서 비석 주위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그러나 고골리만은 종이와 크레파스를 손에 들고 무덤에서 무덤으로 옮겨 다니면서 이미 죽어버린 이름들을 하나씩 하나씩 되살려내고 있었다. 페레그린 워든 D. 1699. 에제키엘과 유라이어 락우드 형제. R.L.P. 고골리는 이 이름들이 좋았다. 그 기이함과 화려함이 좋았다. "이런 이름들은 요즘 보기 힘들지." 그 앞을 지나던 보호자로 따라온 학부보 중 한 명이 , 고골리가 문지른 이름들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어찌 보면 네 이름처럼 말이야." 이제까지 고골리는 이름도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름 또한 사라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었다. 학교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다른 아이들은 문지른 종이를 찢거나 구기고, 아이들 머리 위로 던지거나 짙은 녹색 좌석 밑에 버렸다. 그러나 고골리만은 문지른 종이를 양피지처럼 조심스럽게 말아서, 무릎 위에 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집에 오니 엄마는 질겁을 하였다. 무슨 현장 학습이 이렇단 말인가? 시체 얼굴에 립스틱을 발라서 공단이 깔린 관에 넣는 것으로 부족하단 말인가? 미국이란 나라에서만(그녀가 요즘 자주 사용하는 문구이다), 미국이란 나라에서만 예술이란 이름 아래 아이들을 묘지에 데리고 갈 것이다. 이렇게 나가다가 다음은 어디가 될지 궁금했다. 시체실에라도 데리고 갈 것인가? 캘커타에서 강변에 있는 화장터는 가장 금기시되는 장소라고 그녀는 고골리에게 말해주었다. 보지 않으려고 해도, 그녀가 그곳에 있지 않고 여기 있었어도―두 번 다 그녀는 이곳에 있었다―그녀는 부모님의 시신이 불길에 타오르는 것을 본다고 말해주었다. "죽음이란 장난이 아니다. 그림이나 그리는 장소가 아니란 말이다." 볼멘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아시마는 부엌에 전시한 고골리의 다른 그림들―목탄화, 잡지를 찢어 붙인 콜라주, 백과사전에서 보고 그린 그리스 신전의 스케치, 그리고 도서관에서 개최한 미술대회에서 일등을 한 도서관 정면의 파스텔 그림―과 함께 이 그림을 걸어놓지 않았다. 아들의 미술작품을 한 번도 마다한 적이 없었던 그녀였다. 고골리의 실망한 얼굴을 보니 죄책감을 느꼈지만, 상식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벽에 붙여놓은 부엌에서 어떻게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고골리는 이 그림들에 벌써 정이 들었다. 설명할 수는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유들 때문에 엄마가 그토록 질겁하셨어도 이 종이들을 버리기 싫었다. 이 오래된 청교도의 영혼들, 미국에 맨 처음 정착한 이민자들―예전에 사라져 버린, 이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름의 소유자들―이 그에게 무언가 말해주고 있는 듯하였다. 그는 종이를 다시 말아서 이층으로 가지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방 옷장 뒤에, 엄마가 절대 들여다보시지 않을 만한 곳에 숨겨 놓았다. 이들은 여기서 앞으로 다가올 세월의 먼지에 덮여 잊혀진 채, 그러나 안전하게 남아 있게 될 것이다. - p.92~97
 
 
······그래서 아쇼크는 그의 아들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당분간 묻어두기로 하였다.
 "다른 이유는 없다. 자거라." 그는 고골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문 앞에서 멈칫하더니 몸을 돌렸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언젠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고골리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 속에서 나왔다'라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언젠가 이해할 날이 있을 거다. 생일 축하한다."
  고골리는 일어나서 아빠가 열어놓고 나가신 문을 닫았다. 아빠는 언제나 조금씩 문을 열어놓고 다니는, 남을 귀찮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고골리는 아예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책은 책꽃이 맨 꼭대기, 하디 소년 시리즈 두 권 사이에 꽂아놓았다. 그가 다시 가사를 들여다보며 침대에 자리를 잡았을 때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그의 이름을 따온 이 작가 말이다. 고골리는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이였다. 고골리 강굴리는 애칭이 본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성이 이름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러니까 러시아든 인도든 미국이든, 이 세상 사람 중에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이름을 따온 사람조차도 그와는 이름이 달랐던 것이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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