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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산책로에서

by 눈부신햇살* 2022. 9. 2.

 

어디 갔다가 돌아오는 길, 일부러 한 정거장 전에 미리 내려 산책로로 접어든다.

어느 한때 내가 날마다 걷다시피 했던 길 위의 풍경을 감상하며 느긋하게 걷는 길.

처음 보았을 때 어린 나무였던 길가의 나무들은 흐르는 세월을 따라

어느덧 훌쩍 자라 커다란 나무 그늘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15여 년 전 산책로의 어린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그늘이 아직 짧을 때,

쏟아지는 오전의 맑고 눈부신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걷다 보면 행여 기미 생길까

노파심이 들어 흡사 무장 강도의 복장을 하고 걸었더랬다.

mp3 이어폰 귀에 꽂고 그 햇살을 담뿍 받으며 날마다 열심히 걸었던 결과,

걷기 다이어트에 성공해 4~5kg 빠진 내 모습을 보고 친구는 얼굴 버렸다 타박하고

모임에서는 무슨 일 있었느냐고 염려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지.

다시 조금만, 한 2kg 정도만 찌울 요량이었으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간신히 뺐던 4~5kg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와 휩쓸려 왔다가 휩쓸려 가며

사라지는 물거품을 바라보는 것처럼 허무함을 느껴야 했다.

그나마 그때는 지금보다 젊어서 노력하면 결과가 보였으나 지금은 여간해서는 살 빼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이 길은 호수처럼 멀리 시원스레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둘레를 걷는 길이 아니라 길 끝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길.

그래서 더러 지루하다고 느껴지는 날도 있어 그런 날엔 노래에 더 몰두하게 되던 길.

봄이면 벚꽃보다 조금 더 진한 연분홍빛 살구꽃이 군데군데 화사하게 피어 길을 장식했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분분히 꽃잎을 날리며 눈 내리는 정취를 선물하면 아, 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던 길.

꽃이 지고 풋살구가 달리면 매실인 줄 알고서 검정 봉지 들고 와 따가는 것을 목격하여 실소를 머금게 하고,

유월이 되어 노랗게 살구가 익을 무렵이면 역시나 검정 봉지 들고 와 한 봉지씩 따가는 사람을 보기도 하고,

그러고도 살구는 넘치도록 많이 열려 길 위에 떨어져 뒹굴며 무심한 발걸음에 짓이겨지며 썩어가던 길.

 

가을이면 대왕참나무에 열린 작은 도토리 같은 열매를 줍는 것을 보기도 하던 길.

겨울이 와도 잎을 떨구지 않고 겨울 내내 달고 있다가

새잎이 돋아나는 봄이 되어서야 우르르 잎을 쏟아 놓는 대왕참나무의 특성을 알게 되던 길.

키가 어찌나 반듯이 크게 자라는지 이름 그대로 참나무의 왕,

`대왕참나무'구나 생각 드는 나무들이 나란히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길.

 

내가 나무와 풀과 꽃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데에 일조하던 산책길을

타박타박 성큼성큼 시적시적 자박자박을 반복하며 온갖 해찰을 다하며 돌아오는 길 위의 풍경들.

 

 

 

산딸나무 열매가 익어가고 있네

 

중국단풍나무 모여 있는 곳

 

 

 

8월이 끝나갈 무렵엔 초록초록한 길

 

가을날엔 단풍이 멋진 대왕참나무 길

 

 

 

 

 

 

 

 

 

 

 

 

 

 

 

 

 

아파트 단지 화단 한켠에서는 금불초가 화초처럼 자라고 있다.

 


또 다른 어떤 날엔 반대쪽으로도 걸어가 보았다.

오래된 mp3 이어폰 귀에 꽂고 오래전 걷던 날들의 감상에 젖어 걸어보았던 길.

 

이렇게 무리 지어 뭔가를 먹고 있던 비둘기 떼가 갑자기 날아오르며

내 쪽으로 날아오는데 마치 히치콕의 <새>란 영화를 보는 줄 알았다.

- 어, 어, 뭐야? 뭐야? 어, 무서워!

새들은 내게로 곧장 날아오는 것 같았지만 용케도 나를 피해 날아갔다.

쟤들도 다 생각이 있겠지만......

 

눈부신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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