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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호

6월의 열매들

by 눈부신햇살* 2021. 6. 15.

 

봄에 꽃 피웠던 나무들이 어느덧 하나둘 열매 맺는 시기가 유월인가 보다.

길을 가다 보면 이 나무 저 나무에서 열매를 볼 수 있다.

 

 

 

6월의 살구나무

                                          김 현 식

 

피아노 소리는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밖엔 비가 내린다 기억나는 일이 뭐,
아무것도 없는가? 
유월의 살구나무 아래에서
단발머리의 애인을 기다리며 상상해보던
피아노 소리 가늘고도 긴 현의 울림이
바람을 찌르는 햇살 같았지 건반처럼 가지런히
파르르 떨던 이파리 뭐 기억나는 일이 없는가?

양산을 거꾸로 걸어놓고 나무를 흔들면
웃음처럼 토드득 살구가 쏟아져 내렸지

아! 살구처럼 익어가던 날들이었다 생각하면
그리움이 가득 입안에 고인다 피아노 소리는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밖엔 비가 내린다

 

 

살구처럼, 양산의 가늘고도 긴 현을 두드리던
살구처럼, 하얀 천에 떨어져 뛰어다니던 살구처럼,
추억은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밖엔 비가 내린다
추억의 건반 위에 잠드는 비, 오는, 밤 

 

 

 

살구는 흐드러지게 열렸다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노랗게 익어서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다.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는지 모른다. 일부는 썩어가고 있다.

노랗게 익어가고 있으니 이제는 제법 눈에 띌 수도 있겠다.

 

내 머릿속의 유월은 언제나 살구가 익을 무렵.

그리고 또 하나 떠오르는 시.

 

 

유월이 오면 

                               로버트 브리지스

 

유월이 오면 하루 종일

사랑하는 사람과 향긋한 건초 위에 앉아

산들바람 하늘에 하얀 구름이 만들어 내는

저 높이 해 바른 궁전을 바라본다

그녀가 노래하면 난 노래를 짓고

온종일 달콤한 시를 읽으며

건초 더미에 남몰래 누워 있노라면

오! 인생은 즐거워라, 유월이 오면

 

 

이 달콤한 시를 열네 살 단발머리 소녀시절 막내 고모네에 놀러 갔다가

<향장>이었는지 <쥬단학>이었는지 화장품 잡지에서 보고 한눈에 반해 고모에게 허락받고 한 장 찢어왔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쪼매 조숙한 아이였던가 본데 아마도 멋진 풍경 위에다

이 시를 실어 놓아 거기에 홀딱 빠졌을 것이다. 멋진 풍경과 멋진 시의 조화.

그때 이후로 6월만 되면 잊지 않고 나에게로 찾아오는 시가 되었다.

 

 

매실, 살구와 매실은 너무도 닮아서 마치 일란성 쌍둥이 같다.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차 있는 데로 오자 나뭇가지를 붙들고 열매를 따는 한 가족을 발견했다.

그러더니 이내 그런다.

- 이거 피자두인가 봐!

정답! 자엽자두나무에 달린 피자두이다. 

이름처럼 붉은 잎에 그 보다 더 붉은 열매를 달고 있다.

나는 눈으로만 보고 말았는데 내 손에 닿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흰말채나무 열매

 

딱총나무 열매

 

이 나무 밑에서 감탄하며 서 있는 사람들을 더 자주 보게 되었다.

빨간 열매와 나무가 이토록이나 조화롭게 잘 어울려서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내다니...

 

 

 

가시연의 잎들이 아직까지는 귀엽고 예쁘다.

 

 

옛 노트에서/ 장석남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문학과 지성사, 1995)

귀엽고 앙증맞고 예쁜 앵두.

너무 귀여워서 보자마자 어맛! 하고 감탄사가 나오는 앵두.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의 앵두라서 그나마 이렇게 풍성하게 달려 있고, 조금 외진 곳의 앵두는 남아나질 않는다.

가끔 가다 검정 비닐봉지를 들고 와서 모조리 훑어간다.

지나다니며 나도 이따금 한두 개 맛보긴 했지만 저러는 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든다.

과수나무가 심어진 곳에는 <당신의 양심을 믿습니다>라고 쓰인 푯말도 서 있는데......

 

 

뜰보리수 열매

지나가다가 호기심에 하나 따먹어 보았다.

별로 맛없다. 으악, 퉤퉤......

 

어떤 할머니가 가지치기해놓은 벚나무 가지를 붙잡고 버찌를 마구 따먹고 계시고,

또 다른 어떤 모녀가 가지를 휘어지게 붙들고 따먹고 있길래 퍽 맛있는 줄 알고서

또 호기심에 버찌를 하나 따먹어 보았다. 역시 맛없다. 으악, 퉤퉤......

 

저 뜰보리수 나무는 시댁에도 있었는데 찾아보니 온데간데없다.

아마도 나무 베어버리는 거 좋아하시던 아버님께서 생전 어느 날 베어버리지 않으셨을까 짐작해 본다.

앵두나무도 베어버렸는데 끈질긴 생명력인지 베어버린 밑동에서 새가지가 올라와서 놀라웠다.

 

어린 날 먹었던 둥글고 점이 촘촘히 박힌 보리수 열매는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길쭉한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저 뜰보리수는 `보리수'라고 이름표를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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