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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또 하루

살구꽃이 피었다

by 눈부신햇살* 2021. 3. 27.

 

살구꽃이 필 때면 한 번쯤 떠올려 보게 되는 시.

 

 

 

 

그 여자네 집

 

                                             김 용 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빡깜빡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치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꽃이 핀 살구나무는 벌들의 맛집 내지는 잔칫집.

수많은 벌들의 날갯짓 소리 윙윙 붕붕.

그렇게 많은 벌들이 윙윙거리고 붕붕거려도 무섭지는 않다.

모두 모두 꿀 빠는 데에 몰두하고 있으려니 하는 생각에.

 

 

 

 

 

 

 

 

 

 

 

 

나물을 캤다. 처음부터 그럴 마음은 없었다.

마트에서 된장국에 넣으려고 쑥을 한 봉지 사서 계산하려니 계산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말했다.

- 아니, 이걸 왜 사요? 들판에 나가서 조금만 뜯으면 되는데......

  쑥도 별로 좋지도 않구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눈이 동그래지며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왔다 갔다 한다.

 

걷기 운동 삼아 한 시간 넘게 걸어 나간 이곳의 번화가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쑥을 사는 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이런 소도시에서는 쑥을 사먹는다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인가 보다.

- 아, 그럼 이건 뺄게요. 쑥 뜯으러 가야겠네.

 

그리하여 시작된 쑥 캐기.

햇볕 쏟아지는 벌판의 논둑에 앉아 쑥 캐기 삼매경에 빠졌다.

참 신나고 재미나는 일이었다. 노동이 주는 몰입도와 흥미도는 최고였다.

한참 캐다가 주위를 둘러보면 멀찌감치에서 나물 캐는 사람들이 더러더러 보였다.

그것 또한 묘한 동지애를 불러 일으키는 게 좋았다. 

어떤 불문율이 있는지 캐고 있는 사람 가까이로는 사람들이 다가가지 않았다.

네 구역을 침범하지 않겠다, 하는 그런 생각들?

 

쑥 캐기로 시작된 행위는 점차로 어, 이것은 냉이인데, 이번엔 데쳐서 무쳐 먹어야지 하며 냉이도 캐고,

어, 이것은 데쳐서 쓴 물을 우리고 우려 내도 써서 우리다 지친다는 `지칭개'인데 하며

난 원래 쓴맛을 좋아하니까 이것도 캐가자 하며 캐고,

어, 이것은 개망초 어린 잎, 몇 해 전 엄마가 캐다가 된장 조금 넣고 무쳐 주었을 때 맛있었어 하며 캤다.

얼마나 몰두해서 열심히 캤던지 쑥 조금만 뜯자던 나의 연회색 더스트백은 묵직하게 엉덩이가 축 처졌다.

 

가는 줄 모르게 두 시간이 후딱 지나고 조금 더웠던 봄볕에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등과 얼굴에서 땀이 흘러 내렸다. 집에 가자.

돌아오는 길에 살구나무 사진도 찍고.

 

나물 캐는 일은 힘든 줄 모르고 즐거웠지만 다듬는 일은 지루하고 힘들었다.

쑥은 국을 끓였다. 어린 쑥은 향긋하고 맛있었다.

냉이는 소금간으로 무치고, 개망초는 된장간으로 무쳤다.

이 세 가지는 남편도 잘 먹었다.

문제의 지칭개는 써도 써도 너~~~~~~어~~~~~무 썼다. 우려내지 않고 막 무쳐서일까?

맛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제껏 내가 먹어 본 그 어떤 나물보다도 단연코 썼다.

머위, 민들레의 쓴맛은 비할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자꾸 당겨지는 맛. 뒷맛이 깔끔하고 개운한 맛.

그런데 다음에 또 캐오라고 하면, 글쎄 그때도 지칭개를 캐올까 몰라.

 

 

 

 

나물 캐고 벌겋게 달아오른 아줌마.

 

 


< 덧 붙 임 >

 

어제 TV에 나온 김용택 시인을 봤다.

지금 이 시 속의 그 여자네 집에 살구꽃이 한창이란다.

근무하는 학교의 2층 교실에서 그 여자네 집이 바로 내려다 보인단다.

이 시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서 아들이 이 시를 공부한단다.

쑥쓰러워 한단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시다.

시 속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들어있다.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하얗게 담 너머까지 떨어지는 봄이라는데

하얀 배꽃을 보니 느닷없이 이 시가 떠올랐다.

언제 읽어도 애잔하고, 아련하고, 먹먹해지는 마음에......

 

2005년 4월 23일에 이 시를 올릴 때는 이런 생각도 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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