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월 8일에 어느 문학상 수상작가가 추천하는 글을 보고 사게 된 책이다.
아름다운 문장과 그 사이사이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삽화가 마음을 잡아끌었다.
책 두께도 얇거니와 잘 읽히는 책이어서 단숨에 읽었다.
다 읽고 나니 그리 아름다운 내용만은 아니었다.
아니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눈이 올 때나 폭우가 쏟아질 때나 땡볕이 내리쬘 때나
한결같이 열심히 걸어 다니던 좀머 씨가 마지막엔
온몸에 돌을 달고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던 버지니아 울프처럼
호수 안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2차 대전을 겪은 후유증으로 폐쇄공포증이 생겨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저리 열심히 온종일 걸어 다녀야 했던
좀머 씨에 대한 슬픔, 안타까움, 연민......
그런 좀머 씨를 떠올리게 하는 우리 동네 키 작은 아저씨.
10 여동이 모여 있는 우리 아파트 단지는 마치 작은 섬처럼 오롯이
아파트 단지만 딱 서있고, 주변을 도로가 감싸고 있다.
그 둘레를 천천히 걸으면 한 15분에서 20분쯤 걸리려나.
나는 한창 걷기 운동에 열을 올릴 때도 단지를 뱅뱅 도는 것은 별로였다.
같은 사물, 같은 풍경을 몇 번씩이나 본다는 것은 무료하고 심심한 일이지 않은가.
아무리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라고 해도 그건 썩 내키는 일이 아니어서
언제나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멀리 산책로까지 갔다가 오곤 했다.
그때면 어김없이 좀머 씨를 떠올리게 하는 키 작은 아저씨가
입을 반쯤 벌리고 걷는 동작에 별로 힘도 없이
표정 없는 얼굴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몇 년 동안이나 그 모습을 꽤 자주 보았다.
시장에 갈 때도, 은행에 갈 때도, 세탁소에 갈 때도, 미장원에 갈 때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햇볕이 쨍쨍 내리쬘 때도, 벚꽃이 분분히 흩날릴 때도......
며칠 전 퇴근길에 여전히 아파트 단지를 뱅뱅 돌고 있는
좀머 씨를 떠올리게 하는 키 작은 아저씨를 보았다.
그새 좀 더 여윈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이유로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걷고 있는 걸까.
건강을 목적으로, 혹시 무슨 질병의 치유 목적으로
그렇게 열심히 걷는다면 오히려 해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자주 보았다.
착시 현상인지 옳게 본 것인지는 모르지만
처음 봤을 때보다 몹시 야위어서 옷이 헐렁헐렁하게 남아도는 모습으로
바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자 좀머 씨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지나친 관심은 삼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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