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박자박 느긋하게

걷기

by 눈부신햇살* 2006. 3. 31.

 

 

얼마 전에 내가 많이 생각하는 사람으로부터 '뉴요커'라는 책을 반강제적으로 선물 받았다.

뉴욕에 살고 있는 한 젊은 예술가의 뉴욕 이야기인데, 거기서 뜻밖에도 걷기에 대한 찬사가 나온다. 글쓴이에 의하면 대개 뉴욕 하면 미래형 메트로폴리스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뉴욕에는 차가 없는 사람이 많고, 심지어 진정한 뉴요커라면 차가 없어야 한다는 말도 있단다.

 

눈치 빠른 분이면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비싼 주차비와 불법주차 단속, 무엇보다도 교통 체증도 심해서 차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하지만 나의 예상을 뒤엎고 뉴욕은 걷기에 좋은 도시라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단다.

 

오래된 도시일수록 차들이 지나다니기보다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기에 좋은데, 인체의 척도에 가깝게 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서울 강남의 대로는 걷자고 생각하면 현기증이 나고, 걷기에는 강북의 골목길이 제격이라고. 오래된 길은 걷자고 생각했을 때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며, 그 위를 걷는 이들을 살갑게 품을 줄 안다,라고 역시 글쓴이가 말한다.

 

오래전에 읽은 닥종이 인형 작가이며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의 저자인 김영희 씨의 책에서도 뮌헨의 작은 골목길들은 돌로 깔아져 있고 그래서 맨발로 걷기에도 그만이라고 쓰여 있다.

 

또 얼마전에 본 영화 '비포 선셋'에서는 두 주인공 남녀가 시종일관 파리의 아기자기한 골목길들을 걸으며 얘기를 나눈다.

 

책과 영화에 비추어 보아도 뉴요커의 저자의 말처럼 오래된 도시일수록 걷기에 좋은가보다.

 

누가 내게 집중하는 것을 거북해하는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성격인 나는 나란히 걸으면서 툭툭 별 거 아닌 거처럼 내던지 듯 말을 주고받는 것을 더 즐거워한다. 물론 그 내던지는 듯한 말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걸러낼 줄 아는 영민함과 예리함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것이다.

 

우리 동네는 오래된 토박이들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마당 한편에 꽃나무들을 많이 심어 놓았다. 4월 중순쯤이나 5월에 동네를 산책하기에 그만인 동네이다. 낮은 담장 너머로 그 예쁜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듯이 서 있는 모습을 훤히 볼 수 있다.

 

지금은 동생네 아이를 돌보아주느라 꼼짝을 못하는 친정엄마가 4월쯤이면 꼭 우리 집에 다니러 오셨다. 봄날의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뒷산에서 함께 쑥을 캐어 집에 돌아와서 햇볕 잘 드는 곳에 앉아 이말 저말 하며 쑥을 다듬곤 했다. 앞집의 나이 지긋한 나하고 친했던 이의 시어머니가 어느 날 그 모습을 보고 난 뒤에 집 앞에서 마주치자 그렇게 부러워했다.

"친정엄마야?"

"네."

"어쩐지...... 무슨 말을 그렇게 정답게 도란도란거려? 딸이어서 그랬구나. 며느리들은 절대로 그렇게 도란거리지 않아."

그분은 아들만 둘 둔 분이었다. 지금의 나와 같다. 나도 나중에 그런 생각을 하려나. 며느리들은 절대로 도란거리 지를 않아, 하고. 하긴 나도 시어머니에게 친정엄마에게만큼 도란거리지 않는다. 친정엄마야 조금 이상한 소리 하면 면박도 줄 수 있지만, 시어머니에게 그랬다가는 그날로 보따리 싸서 쫓겨날지도 모르니 조금 이상한 말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쑥을 캐는 것도 하루이틀 캐고 나면 싫증도 나거니와 그 많은 쑥을 처치하기도 곤란해서 남아도는 시간이면 운동 삼아 동네 산책을 나갔다. 엄마는 서울 치고 그리 붐비는 곳은 아니지만,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어서 우리 동네의 올망졸망한 단독주택의 마당을 넘보는 것을 즐거워했다. 나도 엄마의 그런 면을 그대로 물려받았는지 그런 것들을 퍽 즐기는 편이고, 공연히 기쁨이 생겼다. 꽃을 보면 저절로 눈이 커지고, 코가 벌름거려지며, 마음 깊은 곳에서 소박한 기쁨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엄마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나처럼. 아니 내가 엄마처럼.

햇빛 좋은 날, 따사로운 햇살을  등에 받으며 걷다보면 가슴속에서 기쁨이 비눗방울처럼 퐁퐁 솟아오른다.

 

연둣빛 새순이 돋는 철이면 귀엽고 이쁜 연둣빛 새순에 감탄하며,

목련이 탐스럽게 벙글어진 날이면 아기 주먹만한 새하얀 목련에 감탄하며,

벚꽃잎이 눈 내리 듯 하르륵하르륵 분분히 하얗게 쏟아져 내리면 꽃눈에 감탄하며,

개나리가 노랗게 노랗게 피어난 날이면 병아리 같은 귀여움에 감탄하며......

나열하고 보니 봄날에 걷는 것을 최고로 치나 보다.

 

가을에 걷는 것도 좋지만 가을이면 머잖아 닥쳐 올 11월의 스산함이 먼저 다가와서 마음을 지배하므로 봄날이 좋다. 모든 만물이 소생하는 기운을 받아 내 몸에서도 활력이 솟구쳐 오르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래서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고 하나.

 

올봄에는 어떤 기분으로 누구와 함께 길을 걸을까.

'자박자박 느긋하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꽃,꽃  (0) 2006.06.21
산길에서  (0) 2006.05.15
길을 걷는다..  (0) 2005.09.23
기쁨  (0) 2005.05.31
꽃들이 좋아~  (0) 2005.05.0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