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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걷기

[아산 둘레길] - 이충무공묘소 둘레길(어라산)

by 눈부신햇살* 2024. 12. 10.

- 12월 10일 화요일 9시 30분
- 집결지 : 음봉면 삼거리 317(이충무공묘소 주차장)
- 경로 : 이충무공묘소 - 어라산 - 무명산(7.5km 3시간 ☆☆☆☆☆)
 
나이 드는 증상 중의 하나가 깜빡깜빡하는 건망증일까?
며칠 전엔 시골 시댁에 가면서 휴대폰을 빠트리고 가서 얼마쯤 가다 유턴해 돌아와 가져갔는데
이번엔 아무 생각 없이 지각할까 봐 약간의 조바심까치 치면서
10분 전 9시에 도착하게 되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눈에 익은 차는 딱 한 대 서 있었고, 그 외엔 너무도 썰렁한 주차장.
`어? 이건 뭐지? 내가 요일을 잘 못 맞췄나?
아닌데? 다른 날보다 조금 이른 기상 알람이 분명 오늘 아침에 울렸으니 오늘이 화요일 맞는데......'
 
휴대폰의 시간과 요일을 보고 또 보다가 그제야  뒤늦게 퍼뜩 드는 생각.
아, 내가 무심히 습관대로 9시까지 와버렸구나.
이런 바보를 보았나. 헛웃음이 피식피식 났다.
 
이 추운 겨울 아침에 30분이나 일행들을 기다려야 하다니.
어이없는 마음을 다스리며 주변이나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에
저 `충무제' 쪽으로 걸어가다가 눈에 익은 차 주인을 만났다.
"9시인 줄 착각하셨지요?"
상대방도 그렇단다. 나만 그런 건 아니네.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남해 관음포에서 전사했는데, 그 유해는 마지막 통제영이었던 고금도에 모셔졌다.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 아산시 금성산에 안장되었고, 16년 후인 1614년 (광해군 6)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이순신의 묘소는 부인 상주 방씨와의 합장묘로서, 석물로는 상석, 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동자석, 석양 등이 있으며, 묘소 뒤의 곡장은 1970년대에 설치되었다. 봉분 앞 좌측 비석은 이순신의 5대손 이봉상이 이이명에게 부탁하여 1720년(숙종 46)에 비문을 짓고, 1776년(영조 52)에 세웠으며, 우측 묘비는 1998년 순국 400주년을 추모하여 이순신의 후손들이 세웠다. 묘소 권역에는 이순신의 업적을 기리고자 정조와 김육이 글을 지은 신도비를 비롯하여 이봉상 신도비 등이 있다.

 

홍살문을 지나 이충무공 묘로 간다.
 

이충무공 묘가 있는 어라산엔 소나무가 많았는데 지난번 습설인 폭설에 소나무 가지가 많이 찢어지고 꺾어졌다.
다른 나무들은 그 눈에도 별 피해가 없는데 왜 유난히 소나무만 피해를 보았냐는 데에 궁금증이 생겼고
그건 아마도 모두 잎을 훨훨 떨군 활엽수들은 빈 가지라 습설인 무거운 눈이 쌓이질 못 했고
비록 침엽수이지만 잎을 여전히 달고 있는 소나무엔 눈이 쌓여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지가 찢어진 것으로 나란히 걷는 동행인과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리 추측했다.
 
폭설 뒤에 서울 친정에 가서 앞산에 올랐을 때에도 다른 나무들은 멀쩡한데
유난히 소나무 가지가 많이 꺾여 있어 의아했다.
감나무 가지만 약한 줄 알았더니 소나무 가지도 약한가에 생각이 머물렀고
가구도 만드는 단단한 나무인 줄 알고 있어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언젠가 신경숙 작가의 어떤 소설책에서 읽은 글 한 대목도 문득 떠올랐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에 스승의 집인지 별장인지에 가서 
긴 막대기를 가지고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들을 일일이 털어주던 장면.
좀 더 유심히 읽을 걸 그랬다. 아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 기억이 흐려진 것일 수도.
 

나목의 배롱나무들에 눈길이 갔다.
 

이충무공 묘 앞에서 바라보는 홍살문

 

정조 어제 신도비(상충정무지비)

 

`안경진체'라는 멋진 필체라고 한다.

정조 어제 신도비(상충정무지비)

정조가 이순신에게 영의정을 증직한 직후 1794년 손수 글을 지은 비석이다. 비석 상단에는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

즉 충의를 드높이고 무용을 드러내는 바라고 적혀있다.

 

오래도록 서 계셔서 어쩔 수 없이 한 장 찍었다.
지우기 기능으로 지울까 하다가 그냥 둔다.
평일 오전에 와서 절 하고 한참 서 계셨다. 
후손일까? 이 시대를 분개하는 마음일까?
 
인솔쌤이 설명하는 것을 한참 동안 같이 듣고 계시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니 없었다.
 

 

산등성이를 넘어간다. 사진 - M쌤

 

왜 산을 심하게 벌목해서 민둥산을 만들고 그 자리에 이렇게 어린 나무들을 식재해 놓곤 하는지 
무지한 나는 그 이유를 당최 모르겠으며 그런 현장을 볼 때마다 왠지 불편함이 올라온다.
 

 

오래된 석상에 만발한 지의류가 지나간 긴 세월을 말해준다.
 

 

이충무공 부모님의 묘

 

 

어라산을 내려오며 쭈욱 덕수 이씨 문중의 묘들이 순서 없이 자리하고 있다.
 

김육이 쓴 신도비

아산 이충무공묘 진입로 입구에 서 있는 바석으로 1693년 이순신의 외손자 홍우기가 효종 때 영의정 김육에게 비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여 세운 것이다.

 

 

 

 

아산엔 두 개의 유명한 막걸리가 있는데 그중 하나인 `음봉 막걸리' 양조장.
다른 하나는 `신창 막걸리'.
 

지붕 끝 사색 중인 고독한 왜가리

 
 

진창에 서 있는 소들의 처지가 안쓰럽다고 모두들 한 마디씩 한다.
그러자 한쪽에선 그렇다면 대소변을 가려야지,라고 말한다.
그러다 또 한쪽에선 개들처럼 배변 훈련을 시켜?라고 말한다.
깔끔히 관리하기엔 너무도 많은 돈이 들어간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왜 소들은 앉아 있지 않고 서있는 걸까?
진창이어서 앉질 못하나? 별 게 다 궁금하다...
 

 

 

45번 국도를 따라 그냥 쭈욱 가셨다고, 여기에 표시된 백의종군길은 잘못 표기된 것이라 한다.
 

물이 고여 있는 이 동굴은 은을 캐던 `은광'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백의종군길 표지판도 잘못 붙어있는 것이다.
 

개는 보이지도 않는데 커다랗게 짖는 소리가 나서 소리 나는 곳을 찾아보았더니 이렇게 고개를 내밀고 컹컹컹!!!
 

[碑閣(비각)과 碑(비)]

윤보선 대통령 묘소 입구 공터 안쪽으로 碑閣(비각)이 세워져 있었다.
비각에는 敬天孝親(경천효친) 國泰民安(국태민안)이란 편액이 걸려있으며,
비각안에는 윤대통령 역대 조상님들의 공적비 등이 모셔져 있다.
 
이 근처 어디쯤에 국립묘지를 마다한 채 이곳 선영에 대통령 본인이 준비해 두고 가꾸신 자리에
윤보선 대통령 묘소가 있다는데 꽤 긴 층계를 올라야 하므로
이미 많이 걸어 지치고 힘들다고 반대가 심하여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 후에 돌아섰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그것을 깜빡했다가 이제야 묘소에 들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쪽 다리로 우아하게 서 있는 중대백로

 

화살나무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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