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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노트

경주 - 양동마을

by 눈부신햇살* 2025. 6. 20.

몇 해 전 경주에 와서 웬만한 곳은 다 둘러보았다는 생각에
이번엔 시간도 짧아 딱히 경주의 어디 명소를 들를 생각은 없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울산 태화강국가정원이었고,
십리대숲을 걸어보고 국가정원의 요모조모를 살펴보는 것이었기에
그냥 지나쳐 가려는데 이정표에서 양동마을을 발견한 순간 생각이 확 바뀌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울산에 가는 길목이고 하니까 양동마을도 한 번 들러보자.
그래서 가게 된 양동마을이다.

천년의 도시 경주는 한전 건물마저도 고풍스러워 단박에 시선을 잡아끌었다.
남편이 업무 관련 일을 보는 동안 나는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몇 해 전에 와서 일제히 둘러보았던 건물 내 벽에 걸린 분황사 모전석탑, 불국사, 첨성대, 포석정 사진이 반가웠다.

1인 4천 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선 양동마을 초입엔 고풍스러운 꽤 큰 규모의 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양동마을은 500여 년의 전통을 가진 역사마을로 2010년 7월 31일 34차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오래된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점방을 지나치며 하천 너머 양동마을을 바라본다.

지금 아산에 거주하고 있으니 자꾸 외암마을이 떠올랐다.

1인 2천 원 하는 외암마을 입장료부터 시작해서 설화산 아래 평지에 조성된 마을이라는 것과

남편의 여름 휴가를 이용하여 뜨거운 뙤약볕 아래 그때 역시 땀을 뻘뻘 흐리며

더위를 무서워하며 둘러 보았던 안동 하회마을도 떠올랐다.

외암마을과 하회마을은 평지에 마을이 이루어졌다면

양동마을은 특이하게도 설창산 자락에 높고 낮게 조성되어

높은 곳의 고택들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참 좋았다.

 

저기 맨 위 왼쪽 집은 `관가정', 오른쪽 눈에 띄는 규모의 기와집은 `향단'

 

단연코 향단이 가장 눈에 들어온다.

저쪽은 이따가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며 가보기로 하고 하천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 보았다.

오던 길을 돌아보면,

마을로 들어가며 하천 오른쪽으로 보이는 심수정에 올라가 보았다.

심수정은 여주이씨 문중에서 조선 중기 학자 농재 이언괄(李彦适, 1494~1553)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명종 15년(1560) 경에 지은 정자이다. 이언괄은 벼슬을 마다하고 형님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 대신 노모를 모신 분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뜻을 두지 말고 귀먹은 듯 살아가라'는 뜻의 농재라는 호를 스스로 지었다고 한다. 지금 있는 정자는 철종 때에 행랑채만 빼고 화재로 모두 타버러 1917년 원래 모습을 살려 다시 지은 것이다.
`마음을 고요한 물과 같이 가지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으로 안락정과 강학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마을의 서당 역할을 했다. 마을 안팎에 있는 10개의 정자 중 규모가 제일 크며, 여주이씨 집안의 종가인 무첨당과 향단을 바라보기 위해 건물을 `ㄱ' 자로 배치하고 누마루를 두었다.
 

심수정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향단이 보인다.
 

심수정을 감싸고 있는 흙돌담.

강학당 講學堂
이 집은 여주이씨 집안의 서당으로 지족당 이연상 (知足堂 李淵祥, 1788~1846)이 먼저 터를 정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이후 문중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고종 4년(1867)에 학당을 세워 큰 아들 경암 이재목(敬庵 李在穆, 1817~1879)이 많은 후학들을 길렀다. 또한 이곳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주요 터전으로 활용되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이석채(李錫採, 1892~1984)는 이연상의 4대손이며 이 집에서 태어나 활약하였다. 공부하는 곳이니 만큼 대문과 담장 없이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었으며 앞마당에서 마을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강당은 명리재(明理齋)이며 장판각(藏板閣)이라는 편액이 걸린 방은 책과 경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동쪽에 있는 행랑채는 서당의 살림살이를 맡았던 곳이다. 여주이씨 집안은 이 서당 이외에도 규모가 좀 더 큰 양좌서당이 있었고 경산서당도 있다.

심수정에서 내려오다 보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누군가 생활하고 있는 듯한 살림집.

마을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는 중에 만난 분홍색 안젤라장미가 예쁘게 피어난 초가집 스튜디오.

불과 이곳까지 걸어오는 동안에 한여름 날씨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뙤약볕 아래
땀이 퐁퐁 솟아나서 앞섶과 등이 젖었다. 6월 중순에 벌써 이렇게 덥다니......

한옥스튜디오 끝에 서 있던 왕버들 노거수.

 

거림(居林) 쪽

지금은 살구가 익을 무렵.
 

수졸당 고택으로 올라가는 길.

 

 

 

수졸당 고택 守拙堂 古宅
이 집은 회재 이언적의 넷째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李宜潛, 1576~1635)이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지은 것으로 그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이의잠의 9대손인 이능수(李能洙, 1807~1884)가 화재로 소실된 사랑채를 다시 지었는데 사랑채에 비해 대문채의 기단과 지붕을 낮게 지어 두 건물의 격식을 고려하였다. 나무를 심고 아름답게 가꾼 `안골동산'이라 부르는 비탈진 언덕이 집을 감싸고 있어 높은 곳에 있어도 아늑한 느낌을 준다.

경주에는 겨울에 눈이 얼마큼 오는지 모르겠지만
눈 오는 날엔 두문불출하여야겠단 생각이 들 만큼 경사도가 꽤 높은 기다란 길을 걸어 올라가니
수졸당이 있었고 그곳에서 내려오며 바라보니 거림 쪽이 잘 보였다.

대문간 옆 장작더미!

 

 

 

수졸당 고택을 나서며 숲 사이로 언뜻언뜻 고택들이 보이지만 길을 돌고 돌아 한참 걸어가야 할 터라
너무 더워서 저곳까지 가보고 싶은 생각이 섣불리 들지 않았다.
기온이 34도까지 올라간 날이었다.

하천변 가게에서 칠성사이다가 70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시 하천을 건너 향단으로 올라가며 마을을 내려다본다.
저기 숲 사이에 심수정과 강학당이 보이고, 좀 더 왼편으론 한옥스튜디오가 보인다.

 

하천을 따라 거닐어 심수정을 보고 거림(居林) 쪽으로 갔다가 하천을 건너 골목을 걸어 올라가 수졸당고택을 둘러보고
다시 하천을 건너와 마을을 돌아보다가 또다시 하천을 건너 향단으로 올라갔다.
고택들을 구경하려고 하여도 문 닫힌 곳도 있고, 개방되지 않는 곳도 있어
시원스럽게 구경하는 맛은 들지 않았다.

 

향단 문 앞에서 바라본 마을 풍경.

이 집은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인 중종 38년(1543)에 병환 중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임금님이 지어준 집이라고 전한다. 이언적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동생 이언괄(李彦适, 1494~1553)이 형님 대신 노모를 모시고 살던 집으로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 이의주(香壇 李宜澍, 1567~1637)의 호를 따라 집의 이름을 지었다.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벗어난 형식으로 편의성을 위해 행랑채. 안채. 사랑채가 모두 한 몸체로 이루어지고 2개의 마당을 가진 특이한 구조다. 집주인의 개성을 반영한 독특함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향단 계단을 내려와 관가정 쪽으로 가본다.

오묘한 색감의 접시꽃

 

이번엔 관가정으로 올라간다.

관가정(顴稼亭 보물 제442호)
이 집은 조선 중종 때 관리로서 청백리였던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3~1529)의 살림집으로 중종 9년(1514)에 지은 집이다. `관가정(顴稼亭)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누마루에 올라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익는 들판과 강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대청이 매우 넓은 것이 특징인데 살림집이 후대로 오면서 제사 때 필요한 공간 확보를 위해 변형된 것이다. 본채의 뒤쪽에 사당이 있으며, 특이하게 대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대문과 담은 원래 없었으나 1981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조선 중기 남부 지방의 주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뒤뜰에서 들여다본 관가정 대청마루
 

관가정에서 바라보는 마을 풍경.
 

 

관가정 사당

 

손소 적개공신화상(孫昭 敵愾功臣畵像 보물 제1216호) 복제품
손소(1433~1484)는 양동마을 경주손씨의 입향조이며 우재 손중돈의 부친이고, 회재 이언적의 외조부이다. 1459년 세조 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1467년 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에 평로장군 박중선의 종사관으로 군무를 맡아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적재공신2등에 녹훈되어 이 공신도상을 받았으며 오른쪽 상단에 "계천군 손소의 진영이다. 성화 12년 병신년에 상께서 충훈부에 명하여 여러 공신들의 도상을 그려서 내려주라 하셨는데 이때 손소의 나이는 44세였다."라고 쓰였다.

 

느끼한 향이 나는 나무가 의외로 많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이름 모를 나무였다.

관가정을 올려다보며

 

 

 

네 귀퉁이에 치미가 서 있는 다리를 건너 울산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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