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이 뜰 때부터 보름달이 뜰 때까지 사진에 담아 보았다.
형편없이 허접한 사진이지만 달 보며 보낸 나의 하루와 나의 마음을 추억으로 남겨 본다.
산책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초승달을 발견했다.
실낱 같은 눈썹달을 보고 초사흘 달 때쯤 되려니 생각했지만 달력을 보니 음력 8월 초닷샛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오랜만에 애니골로 돌아서 오는 코스를 선택했다.
우리가 이사 와서 십오 년 가까이 사는 동안에 많이 변한 애니골.
예전 아기자기한 좁은 길에 즐비한 예스러운 정취를 자아내던 음식점들을 하나둘 허물고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서 한결 깔끔한 분위기의 동네가 되어가지만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언제부터인지 예스러운 것에 집착하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나이 먹는다는 증거일까?
일요일 저녁, 이번에는 혼자 아산으로 내려가는 남편 편에 작은아들에게 줄 반찬 몇 가지를 들려 보냈다.
코로나 4단계로 인해 계속 재택근무이니 배추김치와 제육 잰 것과 견과류 넣은 멸치볶음과 나물 반찬 두 가지를 보냈다.
냉장고가 작아서 더 보낼 수도 없지만, 더 이상 해봤자 미처 다 먹지 못하고 기간 지나면
음식물 쓰레기로 버릴 수도 있고, 더군다나 햇반찬 좋아하는 우리 식구 식성에는 별 소용없는 일이다.
볼 일이 있어 행정복지센터에 갔다.
흔히 말하는 예전 `나때'는 동사무소라고 부르던 곳이 주민센터라는 이름을 거쳐 행정복지센터가 되었다.
동사무소 마당에는 천막이 쳐지고 많은 사람들로 붐비었다.
어르신들이 인터넷으로 신청하지 못하는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신청하러 오셨나 보다.
동사무소에서는 팩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서 서류를 팩스로 보낼 수 있어 편리했다.
옆 동네로 산책을 갔다.
산 밑 아파트 사이로 한적하고 고즈넉한 길을 걷다가 놀이터 벤치에 잠깐 앉아 쉬었다.
달무리가 조금 진 달이 떴다.
낮에 퍼머를 하면서 동네 소식을 듣는다.
옆 건물의 고깃집은 손님도 없는데 어떻게 버티는지 궁금했던 의문도 풀린다.
그 식당의 건물주란다.
모퉁이의 새로 생긴 닭갈비집은 왜 그렇게 주인이 자주 바뀌나 했더니
개업발 끝나면 파리 날리기 일쑤인데 가겟세가 월 200이란다.
며칠 문 닫혀 있던 학교 앞 외국인이 운영하는 피자집은 주인이 미국에 잠깐 다니러 갔단다.
그 집도 장인어른이 건물주란다.
요즘 잘 보이지 않는 숱 많은 은발머리 여인네는 근처 더 비싼 아파트로 이사 갔단다.
등등......

그새 한 주가 흘러 금요일 오후.
다시 남편이 올라왔고 우리의 오랜 단골집에 가서 짬뽕 한 그릇과 깐풍기를 시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반주를 한다.
맥주는 도수가 약하고 배만 불러 소주 살짝 섞어 소맥으로 마신다.
그래 봤자 작은 병의 맥주 한 병과 소주 한 병.
비율이 맞지 않아 남는 소주는 나눠 마시다 결국에는 남겼다.
토요일에는 오랜만에 뒷산에 올랐다.
명절을 앞두어서인지 사람이 뜸했다.
붙여 놓은 돌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 흉하던 벽은 이렇게 말끔히 벽화를 그려 놓았다.
일요일, 추석 전전날. 추석 쇠러 작은 아들이 왔다.
그 밤엔 선물 들어온 제주 흑돼지 굽고 전복 쪄서 버터에 굴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담근 복분자 걸러 셋이서 반주 삼아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추석 전날, 계속 달 사진을 찍었지만 더욱더 형편없이 나온지라 차마 올리지 못한다.
추석 쇠러 시골 시댁에 갔다.
막히면 명절엔 7~8시간 걸리기도 하는 길을 이상하리만치 길이 쌩쌩 뚫려 3시간 만에 시댁에 도착했다.
어머님이 언제 올라가려고 하느냐, 내일은 마늘을 심어야 된다고 해서
추석 차례 지내고 나면 모두 간다고 일어설 테니 오늘 지금 당장 심자고 말씀드렸다.
건강이 안 좋아지신 큰아주버님은 집에 계시고,
나와 남편, 우리 아들, 나보다 조금 늦게 온 동서, 어머니, 다섯이서 창고 앞 밭에 마늘을 심었다.
어머니 빼고 모두 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 고되고 힘들어서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녁엔 내가 집에서 재 간 LA갈비를 굽고 텃밭의 가지를 쪄서 무치고
어머니가 담가 놓으신 파김치와 함께 일찍 온 식구들끼리만 식사를 했다.
다음날 아침에 다른 집 식구들이 도착하고
어머니와 큰아주버님 의견이 맞지 않아 힘겨운 분위기 속에서 차례를 지냈다.
새벽에 천둥 치고 큰 비가 내려 길이 험한 곳이라 성묘는 가지 못했다.
점심도 먹지 않고 곧바로 흩어져 가는 다른 집 식구들에게 재 간 갈비를 조금씩 나눠주었다.
추석 당일, 아니나 다를까 시댁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어찌나 막히던지 7시간 넘게 걸려 친정에 도착했다.
작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모이지 못하고 따로따로 다녀갔는데 모두들 백신 맞았다고 올해는 모일 수 있었다.
오랜만에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흐뭇해하는 엄마의 얼굴.
나중에 너무 좋았다고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제부랑 조카는 그 밤에 집으로 가고 셋째 동생만 하루 남아 함께 잠을 자고 난 다음날.
일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생을 바래다 주러 간 쌍문동.
유명한 <응답하라 1988>의 무대인 쌍문동.
응답하라 시리즈 중에 가장 재밌었다고 맘이 맞아 나누는 이런저런 얘기들.
몇 주만에 아산으로 돌아와서 본 설화산 위로 떠오른 둥근 열이렛날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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