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
나의 주량은 맥주 한 병, 소주 반 병, 양주 반 글라스, 막걸리 1리터짜리 한병, 동동주 넉 잔 정도이다. 그 정도 마시면 알딸딸하니 딱 좋다. 세상이 부드럽게 흘러가고, 모든 일이 다 잘되어가고 있다고 생각 들고, 맞은편에 앉은 신랑이 퍽 맘에 든다.
이 주량은 남편을 상대로 마셨을 때이고, 고무줄 주량인지 시시때때로 약간의 변동사항이 있다.
동창회 같은 데서나, 다른 모임에서 마시면 내 주량이 도대체 얼마인지 모르겠다.
원래, 누구 표현처럼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정도로 완벽주의자여서
흐트러진 모습은 우선 내가 못 견뎌하므로 절대로 허튼짓을 할 정도로 취하지 않는다.
남편과 같이, 단둘이 마실 때만 적당히 취한다.
술은 연애 시절에 애인이던 남편으로부터 배웠다.
나는 스물다섯 살이 되도록 "내 애인이야!"하고 내세울만한 남자가 없었다. 그렇다고 남자를 전혀 사귀지 않고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군 제대하고 복학할 때까지 잠시 비는 틈에 우리회사에 들어왔던 녀석으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아서 꽤 오래 만나본 경험도 있고, 동창 녀석을 두세 달에 한 번쯤 단둘이서만 만나본 적도 있고, 줄기차게 쫓아다니던 남자를 두세 번 만난 적도 있다.
잠시 휴학생이었던 그 녀석은 내가 회사 층계를 걸어내려오는데, 너무 이쁘더란다. 하얀 투피스를 입고 살랑거리면서 내려오는데 퍽 맘이 끌렸던가 보다. 내가 하는 일의 특징상 이따금 그 녀석에게 부탁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문을 텄고, 복도에서 오다가다 인사 나누고, 나랑 동갑내기인 걸 알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차나 한잔 마시자는 말에 촌스럽게 일대일로는 만나기 싫어서 단짝 친구와 함께 나가고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 한 육 개월쯤 만났을까, 전혀 남자로 뵈지 않는데, 자꾸만 애인이길 원해서 끝을 냈다.
그래도 나나 무스꾸리 좋아한다는 내 말을 허투로 듣지 않고, 생일에 내 친구들에게 한턱내면서, 장미 꽃다발도 안겨 주고, 나나 무스쿠리의 레코드 판도 사 오고, 샴페인도 터뜨려 준 녀석이다. 지금 생각해도 착하디 착한 녀석이었는데,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절대로 절대로 남자로는 뵈지 않을 것 같다.
첫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동창녀석의 태도는 늘 모호하고, 미적지근한 거여서 절대로 나 혼자 앞질러가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 늘 고개를 치켜들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언제나 늘 마음을 잘 다독거려서 간수했다. 덕분에 상처받지 않았을까. 잘 모르겠다.
남편은 처음부터 남자를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매사 확실하고 분명한 태도. 확실한 애인 대접. 나 이외의 여자에게는 절대로 마음 주지 않고, 눈길 주지 않을 것 같은 믿음. 함께 있으면 든든했다.
만난 지 100일 됐다고 백일반지도 끼워 주고, 2주년 기념일에는 귀걸이도 선물하고, 무엇보다도 슬프고 힘들 때는 언제나 내게로 제일 먼저 달려왔다.
두 번째 시험에 떨어졌을 때, 남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리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내려앉았다.
세 번째 시험에 떨어졌을 때, 둘이서 대성리에 갔다.
산과 산이 손을 맞잡은 듯이 분홍의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봄날이었다. 강가라 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둘이서 별 말없이 긴 강가를 천천히 걸었다.
그 얼마 후에 회사도 빠지면서 둘이서 강릉에 갔다. 경포호수를 씽씽 달리는 자전거 뒤에 앉아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얼마 후에 둘이서 한 이불을 덮었다.
신혼생활을 꾸렸던 그 골목에서 남편은 '시계'로 불렸다. 어찌나 정확하게 퇴근해서 들어오는지 "지금 몇 시구나."하고 시간을 알아맞힐 정도였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이따금 얼큰한 찌게 국물이나, 매콤한 볶음 요리를 먹을 때면 꼭 술을 마시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내게도 권하는데, 나는 일찍이 남편과 연애하면서 석 잔의 소주로 필름이 끊긴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별로 마시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면 남편은 혼자 마시는 술은 정말 맛이 없고, 재미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온갖 인상 찡그려가며 한잔, 두 잔 받아 마시던 것이 지금은 벌써 기분 내키면 둘이서 소주 두 병을 해치우는 일도 생기게 되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슬슬 나는 술을 즐기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제는 남편이 밖에서 식사를 하고 들어오는 경우에도 기분이 울적하면 울적해서 한잔, 반찬이 안주하기에 좋으면 그래서 한잔, 기분이 너무 좋으면 좋아서 한잔, 피곤하면 피로 회복제로 한잔. 애주가의 경지에 들어섰다.
혼자서 마실 때는 주로 막걸리나 맥주를 마시는데, 군인이신 큰 아주버님이 가끔 군납이라고 찍힌 양주를 한 병씩 선물하는데 그것을 반주로 마실 때도 있다.
이번 설날에도 한병 받아와서 내가 반주로 끝을 본 것 같다. 남편은 벌써 4년째 퇴근 후에 헬스를 하고 들어오느라고 언제나 아이들과 내가 먼저 저녁을 먹고, 남편은 9시 반쯤에 혼자서 늦은 저녁을 먹는다. 그러다 보니 홀짝홀짝 마시던 것이 어느새 바닥을 보던 날, 남편이 어처구니없어하면서 한마디 했다. "반주로 양주 마시는 사람, 당신밖에 없을 거다."
그뿐인가, 얼마 전 박람회인가 다녀온 남편이 와인 두 병을 들고 왔다. 그것도 해치웠다. 그리고 어디서 받아온 코냑 한 병이 있는데, 그것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남편이 그것은 다시 누군가에게 선물 줄 거라고 못 박아서 참고 있다.
슬쩍 따서 마시고 "아잉~"하면서 이쁘게 웃어줄까. ^^*
그래도 알코올 중독 정도는 아니니 염려들 마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