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외암마을 건재고택
지난 토요일에 남편과 시동생과 작은시누이네 부부, 넷이서 도고CC에 골프 치러 가고,
남은 동서와 나 둘이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둘이서 재미있게 하루를 보내라고 남편은 내게 현금을 입금해 주고,
시동생은 동서에게 카드를 줬다는데 시동생의 카드로 점심을 먹었다.
그전에 몇 번 갔었던 이탈리안식당 보네르 플라워에서
채끝등심스테이크+로제 파스타+고르곤 졸라 피자 세트를 먹었다.
서빙하시는 분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동서지간임을 확인하더니 부러워했다.
실은 우리도 단둘이 밖에서 외식해 보기는 처음이다.
식사 후 둘러볼 곳으로 신정호 둘레 걷기와 외암마을 중에서 외암마을을 선택했다.
외암마을 근처에 다다른 순간 또 때를 잘못 맞춰 왔나 싶었다.
무슨 행사를 하고 있는지 주차장은 만원이었고,
제1주차장에 어렵사리 주차를 하고 냇가 건너편에서 외암마을을 바라본다.
입장권(아산 시민은 공짜)을 끊고 들어서면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외암마을 풍경.
우리는 왼편으로 꺾어 들어 공연을 보러 갔다.
`말괄량이 삐삐'의 머리를 하고 있는 듯한 금낭화
한쪽에선 리마인드 웨딩인지 연세 들어 보이는 분들의 전통 혼례식이 행해지고 있었다.
1998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800년대 후기에 건립된 반가로서, 이상익(李相翼, 1848∼1897, 호는 建齋)이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하였다. 이 가옥은 이상익이 전라도 영암군수를 지낸 바 있어 택호를 영암댁(靈岩宅)이라고도 한다.
가옥은 마을 전면부 중심에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평지에 가까운 대지에 행랑채를 두고 그 안쪽에 ‘一’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 그리고 부속채가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튼‘ㅁ’자집을 하고 있다. 사랑채 동측 중문을 거쳐 안마당에 들어간다.
안채 앞에는 중문간에서 곧바로 보이지 않도록 내외 사잇담이 있고, 그 북측에 ‘ㄱ’자 평면의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가 각각 ‘ㄱ’자로 꺾여 안마당을 감싼 튼‘ㅁ’자형 배치를 하고 안마당의 트인 곳을 가로막듯이 좀 떨어져 곳간채와 나무간, 측소 등이 있고, 뒷편에 가묘가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사랑방을 두고 1칸 폭의 대청을 사이에 두고 동측에 또 하나의 사랑방(작은사랑)이 배치되어 있다. 서측 끝에는 누마루를 두었는데 결국은 마루와 방이 반복적으로 배치된 평면 구성이다.
사랑채 측면의 기둥 간살잡이를 보면 가운데 1칸을 정하고, 전후열은 반칸 씩 퇴칸으로 만들어 결국 측면이 2칸 넓이가 되었다. 정면 퇴칸과 동측면 퇴칸에는 마루를 놓았다. 막돌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방주를 세웠다.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안채는 2칸통의 안대청을 중심으로 서쪽 부분에 안방과 웃방 부엌이 남북으로 길게 뻗었고 동쪽에는 건넌방이 있다. 안방 남측의 아래, 윗방과 마루방 한 칸이 모두 사잇장지로 구분되어 필요할 때는 전체를 개방해 넓은 안방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건넌방 앞의 누마루 밑에 아궁이를 두고, 부엌과 가까운 옆마당가에는 넓은 곳간채와 장독대를 두었다. 부엌 위의 다락과 부엌 채광, 환기를 위한 사롱살창이나 광창이 실용적이면서도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대문 밖의 넓은 작업 및 행랑마당이나 사랑채 전면과 오른쪽에 길게 뻗은 사랑마당과 정원, 그리고 안채 후원과 동편마당 등이 다른 곳보다 여유 있는 공간으로, 충청지방 반가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사랑채 앞의 정원은 처음 집을 지을 때 기본적인 구성을 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후손이 일본을 여행한 후 부분적으로 일본식 정원 기법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인 특징은 넓은 외부 공간을 그대로 두지 않고 침엽수와 활엽수를 대담하게 군식(群植)하여 자연스러운 수목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록수를 주기적으로 손질하여 인위적으로 꾸민 일본식 정원과는 다른 모습이다.
내외담 밑으로 만들어진 수구(水口)를 따라 흘러 들어온 물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면서 1자 높이의 작은 폭포를 만들어 연못으로 떨어진다. 연못에 잠시 머물던 물은 남측의 담을 통해 밖으로 흘러 나간다. 수로의 양쪽에는 막돌을 자연스럽게 배열했고, 연못의 상류와 하류에는 작은 돌다리를 놓아두었다. 마치 축소된 자연경관을 보는 듯하다.
정원의 동측과 서측에 각각 하나씩 작은 정자를 배치해 두었다. 정원 중간에는 여러 가지 석물을 배치해 두었다. 이러한 정원의 꾸밈새를 통해 집주인의 자연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외암마을은 500년 전에 정착한 예안 이 씨 집성촌이며, 60여 채의 민가와 체험장이 있다.
건재고택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로 1998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가옥으로
하루 세 번 개방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 외의 시간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매번 올 때마다 생각없이 그 시간을 못 맞추고 비켜서 왔기 때문에 아쉬워하며 그냥 돌아가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번엔 시간을 맞춰 오게 되어 고택을 돌아볼 수 있었다.
문화유산해설사님의 설명도 들을 수 있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건재고택은 설화산을 진산으로 하여 산세에 따라 서남향으로 배치되었으며,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집 안으로 유입하여 수경을 이루게 하였고 화재에도 대비한 특성이 있단다.
건재고택 안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이 보관되고 있는데 그중 도자기, 낙관, 현판 등
무려 300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건재고택은 문간채, 사랑채, 안채를 주축으로 안채와 사랑채는 `ㄱ' 자형 집으로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고.
아산 건재고택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성리학자이신 문신인 외암(巍巖) 이간(李柬, 1677~1727)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집이다. 현재의 집은 외암 이간의 후손인 건재(建齋) 이상익(李相翼)이 고종 6년(1869)에 지었다고 한다.
남서향으로 자리를 잡은 고택은 문간채, 사랑채, 안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광채와 가묘(한 집안의 사당), 왼쪽에 곳간채가 있다.
외암마을 건재고택 문간채 앞에는 500년 된 은행나무 노거수가 있는데
저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 있어서 찍지 못하고 3월 중순에 와서 찍은 사진으로 대체한다.
고택은 돌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담장 일부에는 기와가 올려져 있다.
가장 오른편에 서 있는 이 계절 초록색으로 푸르른 산수유나무는
3월 하순 무렵에 왔을 땐 이렇게 노란빛으로 동네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사랑채와 정원
우리나라 전통 정원은 사랑채 앞마당에 빈 공간을 두는 것이 특징인데, 이곳 정원은 소나무 등 나무를 심고,
일본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서 만들었다고 한다.
전통적이면서도 그 당시 일본의 영향을 받은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정원과 건축 형태를 구경할 수 있다.
고택의 사랑채 정원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는데 연못과 견수로(遣水路)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정원은 다리와 연못 어귀에 있는 폭포로 아름다움을 한층 더하였고, 주변에 늘어선 소나무와 단풍나무 같은
키 큰 나무교목을 비롯해 영산홍 같은 키 작은 나무관목을 심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 마당에는 소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나무를 심었으며, 구도와 학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고, 석함에 괴석(돌로 만든 괴상하게 생긴 돌)을 배치하여 경관의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건재고택의 정원 양식은 부분적으로 일본식 정원기법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건재고택 사랑채 정원은 <한국의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고택> 10선에 오르기도 했단다.
첫 부인과 사별하고 예안 이씨 외암 이간의 증손녀와 22살에 재혼한 추사 김정희의 처가로도 유명한
건재고택은 5점가량의 추사 김정희 친필 현판 외에도 추사의 유물 40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 부인은 추사가 제주도 유배 중에 55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추사 글씨 현판 - 무량수각(無量壽閣) : 만수무강의 뜻.
김정희의 호 완당(阮堂)으로 쓰여 있다.
사랑채 당호인 설산장(雪山莊)
사랑채 측면 밑으로 해설사가 설명해주지 않았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사랑채 굴뚝이 있다.
땅 아래 있는 굴뚝은 여름이면 모기를 쫓아주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안채로 넘어가기 전에 사랑채에서 바라볼 때 왼편인 정원을 살펴본다.
저 석탑 옆의 나무가 산수유나무.
이런 돌다리가 두 군데 있고,
고택은 설화산(雪華山) 남서쪽 자락의 지형을 살려 건물을 배치하면서 계곡물을 끌어들여 수로와 연못을 만들고 불을 끄는 방화수(防火水)로도 이용한 점이 돋보인다.
연못은 구부러진 곡지(曲地) 형태이며 돌로 호안(흐르는 물로부터 제방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구조물)을 쌓아 물이 연못 주변을 돌 수 있도록 하였고, 연못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견수로는 본래 있던 물길을 자연의 계류(산골짜기에 흐르는 시냇물) 형태로 다듬어 꾸몄다.
내외담 밑으로 만들어진 수구(水口)를 따라 흘러 들어온 물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면서 1자 높이의 작은 폭포를 만들어 연못으로 떨어진다. 연못에 잠시 머물던 물은 남측의 담을 통해 밖으로 흘러 나간다. 수로의 양쪽에는 막돌을 자연스럽게 배열했고, 연못의 상류와 하류에는 작은 돌다리를 놓아두었다. 마치 축소된 자연경관을 보는 듯하다.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랑채와 연결된 중문채에 달린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에서 바라보면 내외담이 쌓여 있는데
안채의 여자들을 밖에서 볼 수 없게 하는 용도이기도 하고,
손님이 오셨을 때 저 살짝 튀어나온 내외담 끝에서 옷매무새를 한 번 가다듬고 나올 수 있게 하였다 한다.
사랑채에 연결되어 방향을 달리 한 중문채의 중문을 들어서서
정면을 바라보면 보이는 이 건물은 곳간채와 행랑채이며,
`태극기 휘날리며'와 `취화선'을 찍은 곳이라고 한다.
사랑채와 곳간채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문과 사랑채 아궁이.
남자들은 체통을 지켜야 해서 저 문으로 드나듦을 삼가고 아녀자들과 하인들만 이용하는 문이었다고 한다.
행랑채에서 바라보는 중문에서 이어지는 중문채와 오른편 사랑채 뒤편과 왼쪽 안채 건물 사이에 우물이 있고,
배롱나무 뒤로 안채로 들어올 때의 내외담이 보인다.
오래된 배롱나무 한 그루 운치 있게 서 있으니, 배롱나무 꽃 필 때 오면 마당이 더 화사한 느낌이 나겠다.
안채는 `ㄱ'자 형으로 누마루를 둔 건넌방과 대각선으로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누마루가 딸린 건넌방 문 위에 걸려 있는 이 현판은 얼핏 보면 추사 김정희의 필체 같지만
확실한 자료는 없어서 확신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누마루 옆쪽으로 사당이 있고, 그 옆으로 조금 전 사랑채 정원 귀퉁이에서 보았던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다.
중문채에 있는 추사 김정희 친필의 현판.
일로향각(一爐香閣) : 하나의 마음을 화로에 넣고 담금질하여 향기를 만든다.
조선 후기 양반집의 굴뚝 모양이 높다랗고 특이하다.
안채와 돌담으로 구분되어 있는 가랍집 오른편 한 귀퉁이에 서 있는 커다란 밤나무
건재고택 담장을 나가면 나오는 가랍집.
건재고택에서 부리던 노비들이 살던 살림집이라 하며, 집 앞에 너른 텃밭이 있고,
그 끝에 따로 노비들이 출입할 수 있는 사립문이 있었다.
이제 막 밤꽃을 피어나려 하고 있었고,
저녁은 이런 풍경이 보이는 호숫가 `연춘'이라는 1936년에 문을 열어 3대째 대를 잇고 있다는
유명한 장어집에서 장어와 닭구이를 먹었다.
우리 집에서 1박 하고 다음날은 근처 감자탕 집에서 아침을 먹은 후 헤어져
오후에 비 내리는 신정호를 걷게 되었는데 어쩐지 하루가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