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적적함과 쓸쓸함 그리고...
1. 나 혼자
또다시 혼자 남게 되었다.
넷이서 따로따로 각자 생활하다 주말에 한 번씩 얼굴 본 지가 벌써 반년이 훌쩍 넘었다.
작은녀석이 독립해 나가던 날, 아들의 숙소에서 돌아오면서 지하철역에서 터지는 울음을 참고 참다가
동네 역에서 내려 어두운 길을 걸어오며 펑펑 울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때 왜 그랬을까, 싶게 주말이면 오는 식구들의 얼굴을 보고
일요일 저녁이면 또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는 식구들을 배웅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새삼스럽게 또 눈물이 난다.
지난주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학회에 다녀오느라 한 주 못 보고 그전엔 다른 일로 못 본 녀석이
일이 있어 일찍 갈 때부터 괜스레 울컥해지더니
큰녀석이 저녁 먹고 가고 다시 조금 있다 남편이 가고 나자 불쑥 눈물이 난다.
허참......!
새삼스럽게 우리가 함께 부대끼며 살던 그때가 참 좋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각자 방 하나씩 차지하고 달팽이처럼 쑥 들어가 문 닫고 있어도 너 거기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때.
이따금씩 거실에 나와 별스럽지 않은 말 몇 마디씩 나누곤 이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도
너 거기 있어서 내 마음이 따사로웠던 그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매일 반복되던 그때가.
그래도 매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오는 사람은 남편이다.
갈수록 남편과 단둘이 저녁 먹는 날이 늘어간다. 남편은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오므로.
우리 둘이 저녁 먹는 날이 많네, 하면서 서로를 다독인다.
이런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네, 하면서.....
2. 영화보기
지난 석 달 동안 약 200편의 영화를 봤다.
왓챠 플레이에서 다달이 4900 원을 내면 무제한으로 영화를 볼 수 있으며 또 첫 달은 공짜라고 작은녀석이 소개해줬다.
엄마의 무료함이 걱정되기도 하고 또 그런 쪽에 흥미가 있으니까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나보다.
정작 내가 찾는 영화는 없는 것이 많아서 조금 불만이긴 하지만 정말 원 없이 영화를 보고 있다.
하루에 네 편씩이나 보던 날이 며칠 이어지던 날, 문득 거울을 보다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눈의 실핏줄이 터졌다. 어쩐지 며칠 동안 눈이 좀 아프고 시리며 깔깔하다 했는데
실핏줄이 터진 붉은 눈을 보니 우습기도 하고 무서워 보이기도 했다.
안과에 가야 되나 하다가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자연스럽게 낫는다고 해서 그냥 기다렸다.
사나흘 지나자 원래의 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하루에 네 편씩은 보지 않는다.
큰녀석은 여친이 있고 작은녀석은 여친이 없어서일까.
주중에 한두 번 전화하는 녀석은 작은 아들이다. 일상 이야기도 나누지만 자주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일하게 취미를 나누는 사이다. 혹여 이런 친밀한 감정을 나눴던 시간으로 인해 이다음에
며느리에게 시어머니 노릇하지 않기를 나 스스로 다짐한다.
그리고 매일매일 밤 9시 즈음이면 마치 알람 울리듯이 꼬박꼬박 전화해주시는
내 서방님에게 감사한다. 내 적적함과 쓸쓸함을 덜어준 그대의 노고에 대해.
그대 역시 적적하고 쓸쓸하여 내어 준 시간일 수도 있겠지만......
3. 김혜자과
영화를 보다 보니 텔레비전은 거의 보지 않게 되었다.
요리할 일도 줄고, 세탁할 일도 줄고, 청소할 일도 줄어들어 시간이 남아도는 요즘인지라
운동을 거의 매일 꼬박꼬박 한 시간 반쯤씩 하는데(그럼에도 왜 내 체중과 몸은 한결같이 변화가 없는지 모르겠다)
그때 러닝머신 타면서 예능 프로 보는 게 전부다. 그러다 우연히 `눈이 부시게' 란 드라마를 보게 되었고
김혜자 씨를 보게 되면서 또 인터넷 뉴스에 뜬 머리기사로 접하게 되면서 챙겨 보게 되었다.
아, 그 나이에도 어쩜 그렇게 사랑스러운 행동에 조곤조곤 나긋나긋한 말씨를 갖고 계신지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얼굴에 손대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것도 좋았고(물론 연세보다 훨씬 동안이시고)
빠글빠글한 파마머리가 아닌 것까지 좋았다. 이쯤 되면 무작정 다 좋게 보기로 작정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오래전 울큰시누이가 내게 말했다. 김혜자과라고.
그것도 어느 토크 프로에 나온 김혜자 씨를 봤는데 너무 소녀 같고 순수함이 지나쳐 세상 물정 몰라 보여 조금 이상해 보인다고 하고선
큰시누이와 작은시누이가 눈 맞춰가며 여기도 그런 사람 하나 있다며 내게 김혜자 씨과라고 해서 무진장 화났던 기억.
지금도 그렇지만 앞에선 화도 못 내고 화났다는 티도 못 내는 한 마디로 방안 퉁수인 내가
돌아오며 그 화를 남편에게 다 풀던 날, 김혜자과라고 한 건 칭찬이라고 말해줘서 그 한마디에 화가 스르르 녹았던 날.
다시금 드라마 속의 김혜자 씨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맞아, 김혜자과라고 한 건 정말 칭찬이야.
저렇게만 나이 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저 긴 대사를 암기하는 총명함, 그 연세에 그리 정정한 태도와 행동, 그리고 더없이 온화한 표정과 사랑스러운 미소.
칭찬도 아주 큰 칭찬이란 깨달음에 쓰윽 미소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