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또 하루

잡동사니

눈부신햇살* 2016. 3. 8. 22:33

 

 

 

 

1. 팔랑귀

 

이십 대 시절 어느 하루, 직속상관이 나의 옷 입는 감각을 두고 한 말씀하셨다.

" OOO은 어두운 색의 옷만 입어."

듣고 보니 정말로 내 옷은 무채색 위주였다.

 

괴로운 시절이 있었다. 살다 보면 뭐 그리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을까만

그때는 괴로움에 날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던 시기였다.

그날도 그 괴로움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나 보다. 지금은 이력이 나서

그럴수록 더 밝게 행동하고 더 큰 소리로 웃지만 그때는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던 시절이다.

다른 부서 상사가 출근하는 나를 보고 말했다.

"왜 그렇게 슬퍼보이냐?"

이런 기억들은 왜 지워지지 않고 이따금 어떤 일을 계기로 한 번씩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슬퍼 보이고, 무채색 옷만 입고......

바뀌고 싶었나보다. 서서히 밝은 색으로 돌아서다 못해 원색 위주가 되고

꽃무늬를 입기 시작하고 밝은 체크무늬와 스트라이프가 선명하게 대비되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작은 시누이의 머릿속에도 나란 사람은 그런 사람인가 보다.

오랜만에 얼굴 볼 때면 꼭 내 옷차림에 대해서 평을 해주던데 그중 팔 할이

"언니는 참 밝고 환한 색 좋아해. 응?"

인데 딱히 칭찬만은 아닌 것 같다.

 

며칠 전 이제 겨울옷을 정리할 시점이다 싶어 세탁소에 맡길 스웨터들을 한쪽에다 꺼내 놓았다.

오며 가며 보던 남편이 내게 한마디 하셨다.

"당신은 묘족이야?"

역시 나를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

 

 

 

2. 어떤 꼬마

 

작은 녀석은 주변에서 일어났던 웃긴 일들을 곧잘 미주알고주알 떠드는데

하루는 밥버거를 사러 갔더란다. 점원이 드시고 가실 거예요? 포장하실 거예요? 하고 물어서

포장해달라고 하니 옆에 서 있던 꼬마가 그러더란다.

"우린 드시고 가실 거예요."

아이 엄마도 웃고, 점원도 웃고, 작은 녀석도 웃고.

 

 

 

3. 고봉산

 

요즘의 가장 큰 기쁨은 주말에 돌아온 남편과 둘이서 일요일 오후에 뒷산을 오르는 일이다.

이곳에 이사 올 적에는 이렇게 산이 가까이 있을 줄 몰랐는데 오고 보니 참 고마운 일 중의 하나라고

입 맞춰 얘기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일요일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언제나 오르는 편이다.

그 길에 우리의 무수한 얘기들이 깔렸다. 다른 곳에 가서 살게 된다면 언제나 이 시간들을 그립게 떠올릴 것 같다.

 

 

 

 

 

 

민국이의 왕팬인 나는 민국이를 보려고 시간을 딱 맞춰서 산에 올랐다가 돌아오곤 했다.

지금은 그런 기쁨이 사라졌다.

한때나마 내게 보는 즐거움을 주던 민국아, 잘 자라서 좋은 어른이 되렴.

 

 

4. 질투

 

작은 녀석이 방학동안 읽겠다고 헤밍웨이의 책을 몇 권 샀다.

작은녀석이 읽고 나면 내가 읽는 식이다. 그런 식으로 읽은 책들이 꽤 된다.

서머싯 몸의 <면도날>, <인간의 굴레에서>, <달과 6펜스>, <인생의 베일>을 함께 읽고서

느낀 소감을 이러니 저러니 나눈다. 때론 나는 읽고서 생각하지도 않는 책에 대해서 요새 근황까지도 얘기한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연민>은 절판이 된 줄 알았더니 제목이 바뀌어서 나오고 있었다나 어쨌다나.

그 바뀐 이유가 뭐라나. 들을 땐 열심히 듣고 신선해하고 호응하지만 돌아서면 3분 내로 잊혀버리는 얘기가 다수다.

<연민>이라는 제목에 대해서 왜 그렇게 제목이 붙었는지도 서로 생각을 말하고

남에게 함부로 친절을 베풀 것도 아니라며 맘을 맞추기도 한다.

나는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노인과 바다>에 대해서도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데

같은 책을 읽고서도 어쩌면 더 그렇게 세세하게 잘 기억하는지 젊음과 늙음의 차이인가

지능지수의 차이인가 알쏭달쏭할 때가 있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엔 남편은 옆에서 누워 자고 작은 녀석과 내가 시시때때로 깔깔대며 <꽃청춘>을 보고 나서

자는 남편을 깨워 안방으로 들어오려니 남편이 그런다.

"어쩌면 둘이서 그렇게 할 얘기가 많아? 좋겠어. 둘이서 그렇게 맘이 잘 맞아서. 큰 녀석도 당신만 좋아라 하고."

나는 의식하지 못한 점이고 딸이 없는 걸 늘 서운해하는 편인데 그렇게 말해서 좀 놀랐다.

그래, 생각해보니 딸이 없는 내게 딸 노릇 하는 작은 녀석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