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먹어
작은녀석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아니면 다른 학년이었던가. 몇 살 때의 일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현장학습을 가는 날이였다. 그런 날이면 전날 저녁에 1차로 김밥을 몇 줄 싸서 먹은 후
다음날 아침에 다시 새 김밥을 말아 도시락을 싸서 보내곤 했다. 역시나 아침도 김밥으로 주고
현장학습 다녀온 후에도 간식으로 김밥을 찾을까 봐 여유분으로 몇 줄씩 더 싸놓곤 했다.
아무튼 현장학습 한번 갈 때마다 무지막지하게 김밥을 싸곤 했다. 그러려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서둘러야 했다.
도시락 다 싸고 남은 김밥을 쟁반과 접시에다 썰어 놓고 방에 들어와 잠시 드러누워 있으면서 작은녀석더러
아침을 먹으라고 했었다. 누워서 들으니 식사 끝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서 나가보니 세상에나 현장학습 다녀온 후에도 먹으라고 싸놓은 여유분의 김밥까지 다 먹고 있었다.
한없이 한없이 김밥을 먹고 앉아 있었던 거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게 녀석이 말했다.
"그냥 김밥 먹으라고 했지. 얼마나 먹으라고는 안 하셨잖아요."
"맞는 말이다마는 그 많은 양이 아침부터 들어가니?"
이따금 한 번씩 그 얘기를 꺼낼 때마다 여전히 똑같은 말들이 반복된다.
그러던 녀석인데 크고 나니 예전처럼 덥석덥석 뭘 많이 먹지 않는다. 다이어트를 하는지, 그새 가리는 음식들이
많아진 건지 요즘은 뭘 먹으라고 하면 안 먹어요란 대답이 돌아오는 확률이 80%다.
예전엔 홍시도 먹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아예 단감까지 먹지 않는다. 그나마 먹는 사과도 남편은 곧잘 씻어서
껍질까지 베어 먹는데 반해 작은녀석은 먹기 좋게 잘라서 포크까지 대령해야 먹는다. 그것도 많이 갖다 주면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냐고 타박이다. 상전도 그런 상전이 따로 없다.
얼마 전엔 정년퇴직 후에 제주도로 내려가서 귤농장을 한다는 사촌오빠에게 샀다고 이모가 귤 10킬로짜리 한 박스를 주셨다.
예전 같으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졌어야 할 귤들이 오늘도 내일도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다.
맛없다고 하면서도 있으면 야금야금 먹게 되는 제주의 감귤이나 녹차, 백년초가 들어간 초콜릿들도 들어온 그대로
냉장고에서 뒹굴고 있다.
시골 시댁에서 올라온 대봉과 단감들, 지인이 사과나무 두 그루 있는데 남아도는 사과들이 처치 곤란이라고
가득 한 봉지 받아온 것들이 냉장고에 차고 넘치는데도 도통 안 먹는다.
"야, 냉장고에 있는 것들 좀 먹어. 왜 안 먹어? 감도 있고, 사과도 있고, 초콜릿도 있고, 귤도 있고. 좀 먹어."
한결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안 먹어요."
"너는 언제부터 그렇게 안 먹었어? 야, 너는 옛날엔 엄청 잘 먹었잖아."
다음날도 똑같은 레퍼토리.
"좀 먹어."
"안 먹어요."
"누굴 닮아 저래."
"할아버지 닮아서 그래요."
그 말끝에 둘이서 한참 웃었다.
우리 아버님은 체구가 굉장히 왜소하시다. 아버님의 키와 어머님의 키가 똑같이 168센티인데
그런 경우 남자의 키가 훨씬 작아 보이므로 아버님은 굉장히 작아 보인다.
그래서 위도 작은 것인지 아버님의 단골멘트는
"안 먹어. 안 먹어."이다.
효도하고 싶은 자식들이 아무리 맛난 것을 해드리고 사드려도 언제나 한결같은 말씀.
"에이, 안 먹어. 안 먹어."
안 드시고 싶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으시면 손사래까지 동원하신다.
손을 마구 저으며 짜증 난 표정을 지으며 하시는 말씀.
"에이, 안 먹어. 안 먹어."
그래도 소식과 걷는 게 건강에는 좋은지 여전히 큰 병 없이 건강하신 편이다.
운전은커녕 자전거도 못 타시는 우리 아버님.
아버님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씀과 영상.
손을 저으며
"에이, 안 먹어. 안 먹어."